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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다리우스 1세
입니다 :)

 

다리우스 1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자

 

생몰년 : 서기전 558~486년 
국 적 : 고대 페르시아 
성 격 : 강인하고 호전적이며 용감무쌍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부친은 페르시아 국왕 캄비세스의 사촌 

다리우스는 젊었을 때부터 페르시아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서기전 535년 다리우스는 '만인불사군' 의 총지휘관으로 국왕 캄비세스를 따라 이집트로 출정했다. 

다리우스 연합군은 반란세력의 우두머리인 가우마타와 그 지지자들을 죽이고 페르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등극 초기에는 반란이 끊이지 않아 제국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1년여에 걸쳐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또한 폭동을 일으긴 8명의 국왕을 잡아들여 와해의 위기에 처해 있던 페르시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서기전 520년 9월, 다리우스는 게르만자 동쪽 32길로미터쯤에 위치한 비시툰 마을 옆의 가파른 경사면 절벽 위에 두 단에 걸쳐 그 기록을 새겼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비시툰 비문)으로 페르시아, 이집트, 바빌론의 3가지 문자로 비시툰산 105미터 높이의 절벽에 쓰여 있다. 

이 비문은 다리우스의 업적과 그의 신성 불가침한 권력을 널리 알린 것이다. 

국내 사정을 안정시긴 뒤 대외적인 확장을 하기 시작했다. 

서기전 517년, 그는 군대를 파병해 인도 펀자브 지방을 정벌해 폐르시아 제국의 스무 번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 를 건립했다. 

서기전 513년, 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흑해 북쪽연안으로 가 델로스를 정복하고 나서 해륙의 양로로 진격해 도나우강 하류와 흑해 북쪽 연안의 스키타이족을 향해 나갔다. 

다리우스의 부대는 스키타이인들의 만만치 않은 저항을 받아 8만여 명을 잃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서기전 492년, 다리우스는 그의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6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아테네와 에네트리아)를 정벌하도록 했으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크게 손실을 입고 원정을 포기했다. 

서기전 490년 다리우스는 다시 군대를 보내 그리스를 공격해 마라톤에서 상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강력한 기병 부대를 가진 페르시아 군대는 보병으로만 이루어진 아테네의 군대에 참패해 되돌아오고 말았다. 


원정에 여러 차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는 계속해서 그리스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가 소망을 이루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서기전 486년, 그가 그리스로 출병하려고 계획하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 다리우스는 이를 진압하러 나섰지만 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재위기간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였다. 

그는 중앙 집권제를 공고히 했으며 정치, 경제, 군사 방면의 개혁에 성공했다. 

정치적으로는 정복한 지역에 사트라프 관할구역 조직을 완성했으며 각기 총독을 두었다. 

사트라프에는 분권 통치 방식을 쓰면서도 중앙정부와 서로를 제약할 수 있는 통치 방식을 취했다. 

또 피정성복 지역에 대해서 각기 그들의 종교, 법률 및 풍속을 존중해 주민서 효과적인 중앙 집권체제를 세웠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세제를 도입하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군사직인 면에서는 자신이 군대 최고 통수권자가 되어 각 사트라프의 군정은 권한을 나누어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과 기마부대를 만들었다. 

또 페니키아 수병을 중심으로 함선 600~1,000척을 보유한 함대를 조직했다. 

각 사트라프에 즈둔하는 군대와 신속히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다시 ‘왕도'를 재건해 역과 역마를 두어 페르시아 전역에 걸쳐 교통망을 형성했다. 

그 밖에도 다리우스 1세는 인더스강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항로를 감찰하도록 했으며 나일강 지류에서 홍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했다. 


다리우스의 대규모 영토 확장은 고대 사회의 지역적인 제한을 없애고 각 고대문명간의 교류 범위를 확장시다. 

이것은 인류의 교류 범위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쳐 확장시켰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제국의 뛰어난 정치가인 동시에 세계 역사상으로도 유명한 정치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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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Sakyamuni, 불교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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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입니다 :)

석가모니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석가모니, Sakyamuni, 불교의 창시자

 

생물년 : 서기전 566~486년 
국 적 : 고대 인도 
출생지 : 룸민데이(지금의 네팔 경내) 
성 격 : 의지가 강하며 자애롭고 지혜로움 
신 분 : 사상가, 철학자 
가 정 : 부친은 가비라위성국의 영주

 

석가모니의 원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모의 손에서 자랐다. 

열여섯 살에 카필라성(싯다르타와 같은 나라인 가비라위성국의 성)의 아쇼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홀라를 낳았다. 

이 시기에 석가모니는 호사스럽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의 편안한 생활은 그의 영혼에 평안을 안겨 주지 못하자, 열아홉 살 이후로 자주 여행을 떠났다. 

석가모니는 여행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을 떠나 누구든 생로병사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세상에는 영원한 '무엇' 인가가 존재하며 그것은 어떤 고통이나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는 스물아흡 살이 되던 해에 왕궁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출가하여 진리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는 저명한 바라문 학자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다가 후에 그들의 의견에 따라 고행승이 되었고 장장 6년간의 고통스러운 수행을 했다. 

그 결과 석가모니는 영양 부족과 지나친 피로 누적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깨어난 후에 그는 고행으로는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네란자라 강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차가운 강물로 수 년간의 묵은 때를 씻고, 

젖 짜던 소녀 수자타(우르벳타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였다고함)가 가져다 준 우유죽을 마신 뒤에야 기력을 회복했다. 

그 후 네란자라강을 떠나 베나레스로 향하는 길에서 보드가야라는 곳을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석가모니는 아사타 나무(뒤에 보리수로 불림) 한 그루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나무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앉아 '불도를 얻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인간의 고통을 벗어나게 할 궁극적인 해답을 얻고자 했다. 

49일간의 명상 끝에 드디어 큰 깨달음을 얻어 삶과 죽음을 벗어나 니르바나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해하고 불교의 기본 교의를 세우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석가모니는 아사타 나무 아래의 명상으로 사제설피을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의를 구성했다. 


사제설이란 네 가지 진리를 일컫는 것으로


고제(범인의 삶은 괴로움), 

집제(고통의 원인), 

멸제(고통의 원인을 철저하게 깨달아 니르바나, 즉 열반에 이른 상태), 

도제(수도를 통해 니르바나에 이르는 과정)

 

를 뜻한다. 

인간은 미혹과 집착을 끊고 수행하여 열반에 이르면 결국에는 아라한(궁극의 개달음을 얻은 사람)이 되어 다시는 인간 세계의 윤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교의를 세우고 난 후 설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베나레스의 프르가다바(녹야원으로 지칭되기도 하며 지금의 사르나트를 이름)와 사위술)의 기원정사 등지에서 차례로 설법을펼쳤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는 기치를 펴고 있으므로 빠른 속도로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 명의 상인이 불교에 귀의했으며 뒤이어 일찍이 석가모니와 네란자라 강에서 고행했던 다섯 명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바라문교의 제사장들과 석가모니의 이모 그리아들 또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 붓다(깨달은 자)라고 불렸으며 이 새로운 종교는 '불교'라 전해졌다. 


서기전 486년, 석가모니는 80세 때 왕사성에서 출발해 쿠시나가라로 설법을 전하러 가려했으나 도중에 병이 들어 쿠시나가라의 숲에 있는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유해는 다비(불교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이르는 말)되었으며 사리는 신도들에 의해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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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비, Diana, 영국의 장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다이애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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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비, 영국의 장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이애나 왕비, 영국의 장미

 

생몰년 : 1961~1997 
국    적 : 영국 
출생지 : 노샘프턴셔주 
성    격 : 온유, 성실, 완강 
신    분 : 자선 활동 대사 
가    정 :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2세의 시종, 어머니는 퍼모이 남작의 딸 

다이애나 프란시스 스펜서는 태어날 때 몸무게가 7파운드 12온스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두고 '완전무결한 체격의 표준'이라고 표현했다. 
다이애나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았다. 
또한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우아한 품성을 배양해 하인들은 그녀를 '여백작'이라고 불렀다. 
1979년 다이애나는 '영 잉글랜드 스쿨'의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귀족 신분의 그녀가 유치원 교사가 된 이유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1980년, 다이애나는 영국 왕실의 전통적인 모임에서 그녀보다 12살 많은 찰스 왕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1981년 7월 29일 다이애나는 국민들의 환호성 속에서 런던의 성 폴 성당으로 걸어 들어가며 찰스 왕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통계에 따르면 그날 세계의 7.5억 인구가 텔레비전을 통해 그들의 천상에서와 같은 낭만적 혼인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결혼 후에 매스미디어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녀는 겸손한 태도와 온화함으로 대중들에게 친근함을 주어 존경과 추대를 받았다. 
1982년 6월 21일, 다이애나는 순조롭게 첫째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1984년 9월 15일 다이애나는 또 두 번째 왕자인 해리를 출산했다. 
다이애나는 아이들을 낳았다고 해서 사회 활동에 대한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여왕이나 태후 그리고 찰스와 같은 영국 왕실의 그 어떤 구성원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것은 보수적인 왕실에 있어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이애나와 찰스 사이에도 차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카밀라라는 연인의 출현은 두 사람 사이의 장벽과 불일치를 더욱 부추겼다. 
1986년, 찰스는 공개적으로 카밀라를 '평생의 사랑'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다이애나와 찰스의 시대적 혼인 관계는 끝을 맺게 되었다. 
1996년 다이애나와 찰스는 결국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끝냈다. 

결혼 실패라는 어두운 곤경에 처해서도 다이애나는 공익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이즈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감싸주었고, 앙골라에서 지뢰 제거 활동을 홍보했다. 
아울러 지뢰 사용 금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생활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은 아름답고 선량한 이를 질투했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애인인 도디 알 파예드와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여 고속질주하다 그만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일찍이 한 기자는 다이애나의 죽음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전 유럽 최대의 슬픔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 9월 6일 영국 왕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다이애나를 위한 성대한 영결식을 거행했다. 
버킹엄 궁전은 역사상 처음으로 황기를 내리고 국기로 바꾸었으며, 반기를 걸고 애도의 뜻을 표하며 '왕실의 스타' 다이애나를 기념했다.


다이애나 왕비의 명언

 

언론은 잔인하고 포악하다.

그들은 어떤 일에도 너그럽지 않으며 오로지 잘못에만 흥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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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Osama bin Laden, 이슬람 국제 테러리스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빈 라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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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이슬람 국제 테러리스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빈 라덴, 이슬람 국제 테러리스트

 

생몰년 : 1957~ 2011 
국  적 : 사우디아라비아 
출생지 : 지다 
성  격 : 극단적, 열광적, 수단을 가리지 않음 
신  분 : 테러리즘 지도자 
가  정 : 명문가 출신, 아버지는 건설업계 거물 

오사마 빈 라덴은 20여 명의 아들 중 한 명이며 52명의 형제 사이에서는 17번째이다. 
그는 평범한 외모에 재능과 학문도 보통이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신임을 받지 못했고 결국 그는 점점 과묵한 성격이 되었다. 
라덴은 일찍이 토목기사로 여러 해 동안 어렵사리 사업 경영을 하며 자신을 위한 방대한 경제 제국을 건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건축, 석유, 제조 및 보석 등 수많은 업종에 뛰어들었으며 마약 판매와 무기 매매까지 했다. 
이것은 그에게 풍부한 재원을 마련해주었고 후에 그가 테러활동을 전개하는 데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사업상의 성공은 라덴을 아랍 세계의 정치 문제에 흥미를 가지도록 했다. 
라덴은 아랍국가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언제나 억압받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랍 국가는 미소간의 패권 다툼에서의 카드 한 장이거나 아니면 미국의 추종자에 불과했다. 
그는 이런 정세를 뒤집어 아랍 국가를 위해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은 폭력과 테러였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이슬람 의용군 조직에 참가했다. 
라덴은 그때부터 폭력적인 '성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88년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기지) 조직을 만들고 전문적인 '성전자' 훈련을 실시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전쟁을 지지했으며 무슬림 과격단체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으킨 테러 활동을 위해 역량을 배양했다. 
그로부터 라덴은 테러의 손길을 전 세계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결된 후 라덴은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와 서방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전'을 개시하자고 호소했다. 
라덴과 친서방을 옹호하던 사우디 왕실 간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1994년 4월, 사우디 정부는 라덴의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을 취소하고 아울러 그의 사우디에 있는 재산을 동결했다. 
그러자 라덴은 먼저 예맨으로 건너간 후 나중에 다시 수단으로 들어갔다. 
그는 수단에서 빠른 시간 안에 자신만의 경제 제국을 다시 세웠으며 동시에 끊임없이 테러 전사들을 양성했다. 
1995년 라덴은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 암살 혐의로 이집트와 소련 양국에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조성했다. 
수단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력으로 인해 라덴을 수단에서 쫓아냈다. 
1996년 라덴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후 그곳을 최후의 근거지로 삼았다. 

2001년 9월 11일, 라덴은 세계를 놀라게 한 9.11 테러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는데, 이는 미국 본토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타격이었다. 
그 후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뒤엎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개시하여 라덴의 조직을 제거하려 했다. 
전쟁은 곧 미국의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라덴의 생사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근래 라덴은 여러 차례 녹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테러분자들에게 '성전'을 감행할 것을 호소했다. 
CIA(미국 중앙 정보국)의 분석에 따르면 이 녹음테이프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라덴은 2011년 5월에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국 해군의 데비그루에 의해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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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Bill Gate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빌 게이츠
입니다 :)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

 

생몰년  : 1955~ 
국    적  : 미국  
출생지  : 시애틀 
성    격  : 내향적이면서 카리스마를 지님 
신    분  : 소프트웨어의 신, 세계적 부호 
가    정  :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워싱턴대 이사 

빌 게이츠(Bill은 William의 애칭)는 어려서부터 심신이 건강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또한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세계 도서 백과전서》를 즐겨 읽었으며 위인전기와 문학작품도 좋아했다. 
폭넓은 그는 독서를 통해 지식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빌 게이츠는 양호한 가정교육으로 어려서부터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뛰어넘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다.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 친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게이츠는 친구들 사이에서 결코 하찮은 역할을 맡지 않았으며, 사실 그의 비범한 총명함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열한 살 때 그의 부모는 빌 게이츠를 시애틀의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보냈다. 
그곳은 엄격한 교과 과정으로 유명했으며 우수한 남학생들을 모집하던 학교였다. 
빌 게이츠는 이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컴퓨터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와 그의 친구 P. 앨런은 미친 듯이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열중했고 점점 더 많은 컴퓨터 지식을 얻게 되었다. 
빌 게이츠는 열세 살 때 이미 스스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들 줄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순전히 게임을 위한 것이었다. 
1972년 게이츠와 앨런은 인텔의 8008 마이크로프로세스 칩으로 기기 한 대를 만들어 교통 통계 수치 회사를 창립했다. 
빌 게이츠는 1973년에 레이크사이드를 졸업한 후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2년 동안 빌 게이츠는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포커를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버드에서 자신과 똑같이 컴퓨터에 빠져 있던 스티브 발머를 사귀게 되었다. 
스티브 발머는 나중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경영자가 된 인물이다. 
1974년에 세계 최초의 소형 컴퓨터인 알테어가 탄생했는데, 이것은 게이츠와 앨런의 교통 통계 수치 회사에게 BASIC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들이 만든 BASIC 언어는 알테어 컴퓨터상의 운행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 빌 게이츠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하버드대학을 중퇴한 후 앨런과 함께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했다. 
답했다. 그때 빌 게이츠의 나이는 20세 앨런은 22세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icrocomputer와 soft의 약어이다. 
이것은 마이크로컴퓨터용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전문적으로 추구하겠다는 회사의 이념을 엿볼 수 있는 이름이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발전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기회는 1980년대에 찾아왔다. 
당시 게이츠는 IBM사와 계약을 맺고 IBM이 새로 출시한 퍼스널 컴퓨터에서 사용할 운영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MS-DOS이다. 
1982년, 스물일곱살의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해 미국의 《Money》 지는 표지에 빌 게이츠의 사진을 실었다. 
1986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주식이 상장되고 1년 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주가는 90.75달러까지 뛰어올랐다. 
주가는 그 후 계속해서 상승 주세를 보였다. 
그해 미국《포브스》지에서 게이츠는 미국의 갑부 400명 중 29위에 랭킹 되었다. 
당시 서른 한 살의 게이츠가 보유했던 주식의 가치는 10억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1990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윈도우즈 3.0을 출시했다. 
1992년, 게이츠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며 60억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 가치를 보유했다. 

2000년, 게이츠는 스티브 발머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경영자로 임명하고 자신은 '수석 소프트웨어 설계자'가 되었다. 
그는 1994년 1월 1일에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는 자선 기관인 '빌 앤드 멜린다' 재단을 설립하여 빈곤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가 하면 에이즈 예방과 치료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 
2004년, 게이츠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기사 대영 공로훈장(KBE)을 수여받았다. 
이 것은 여왕이 외국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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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매력의 화신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마를린 먼로
입니다 :)

 

마릴린 먼로, 매력의 화신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마릴린 먼로, 매력의 화신

 

생몰년  : 1926~1962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로스앤젤레스 
성     격 : 다정다감, 선량, 신경질적 
신     분 : 영화배우 
가     정 : 그녀의 어머니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았음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먼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두 모녀를 떠났고, 어머니는 폭음과 정신질환으로 그녀에게 난폭하게 대했다. 
그녀는 마땅히 받아야 할 부모의 따뜻한 정을 받지 못했기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다른 집에서 살았으며 심지어는 고아원이나 수용소에서도 지냈다. 
1941년, 먼로는 캘리포니아로 갔는데 1년 후인 16살 되던 해에 자신보다 4살이 많은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1944년, 도허티는 2차 세계대전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얼마 후 그녀의 새로운 직업을 이유로 그녀에게 이혼을 제기했다. 
먼로의 새로운 직업이란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사진 모델로 일하는 것이었다. 

1946년, 먼로는 20세기 폭스사 사장의 눈에 띄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예명은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 
1947년, 그녀는 《위험한 시대》로 은막에 데뷔했다. 
곧이어 《혜성 미녀》(1950년)와 《아스팔트 정글》(1950년)에서 조연을 맡게 되었다. 
그 후 베티 데이비스 등의 대스타와 함께 《이브의 모든 것》에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는 비록 짧은 단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천진하고 사심 없는 연기는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953년은 마릴린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 영화가 상영된 후 그녀는 일약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다. 
인기가 한창이던 때 마릴린이 주연한 작품들은 대부분 희극성을 띤 작품들이었으며 연기한 인물들도 모두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었다. 
즉, 풍부한 성적 매력과 백치미를 지닌 금발의 미녀 역할 등이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년),《백만장자와 결혼하기》(1954년), 《7년 만의 외출》(1955년) 등의 영화로 그녀는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다룬 영화 등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스릴러물인 《나이아가라》(1953년)나 서부극인 《돌아오지 않는 강》 및 《버스정류장》(1956년), 《왕자와 무희》(1957년), 《뜨거운 것이 좋아》(1959년) 등이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서 먼로는 복잡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을 잘 표현해 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1960년)이었다. 

먼로는 사랑받고 싶어 하던 여인이었지만 세 번의 결혼에서 실패들 경험했다. 
그녀는 스포츠 스타 그리고 누구나 다 알만한 극작가와 결혼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사에서 가장 알 수 없는 일은 바로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과 또 수만 장에 이르는 그녀의 사진을 찍었던 촬영기사와의 애매한 관계였다. 
케네디 형제와의 스캔들은 한 때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부러운 여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이전까지 이혼했던 스포츠 스타와 재결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62년 8월 5일, 먼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인(死因)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마릴린 먼로의 주옥같은 영화들 

마릴린 먼로는 1946년에 영화계에 뛰어들었는데 모델에서 영화배우가 된 경우로 연기에 대한 기초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먼로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배우며 노력하여 영화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녀는 16년 동안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 중에서 《아스팔트 정글,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7년 만의 외출》,《왕자와 무희》, 《버스정류장》 등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영화들이다. 
그로써 먼로의 연기도 할리우드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며 순식간에 5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상 환영받는 여배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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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수상, Margaret Hilda Thatcher, '철의 여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대처 수상
입니다 :)

 

대처 수상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대처 수상, 철의 여인

 

생몰년 : 1925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영국 랭커셔주 그랜덤 
성    격 : 의지가 굳고 고집이 셈, 경쟁을 좋아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부친은 그랜덤 시장이었고 모친은 재봉사였음 

마가렛 대처의 원명은 마가렛 로버츠였다. 
그녀는 1925년 10월 13일, 자신의 집인 잡화점 2층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네 살 많은 언니가 하나 있었다. 마가렛의 집은 오랫동안 가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녀의 집은 2층집이었는데 1층은 가게였고 2층에는 가족들의 침실이 있었다. 
마가렛은 다섯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열한 살 때 케스트벤(Kesteven)과 그랜덤 여자 문법학교에 들어갔다. 
마가렛은 다른 학생들보다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으나 열심히 노력하여 곧 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마가렛은 동급생들 중에서 성숙하고 엄숙했으며 주관이 뚜렷해 행동거지가 분명한 학생이었다. 
학업과 가사일 그리고 교회 활동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 마가렛의 가장 큰 취미는 피아노 연주와 라디오 듣기였다. 

1943년 9월, 마가렛은 옥스퍼드대학 서머빌 칼리지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교내의 각종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옥스퍼드대학 보수당학생연합에 가입했다.
대학 3학년 때는 학생연합의 회장을 맡아 최초의 여성 회장이 되었다. 
1947년 대학을 졸업한 후, 마가렛은 몇몇 회사에서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일을 했다. 
1951년 12월 13일, 그녀는 데니스 대처와 결혼함으로써 마가렛 로버츠는 마가렛 대처가 되었다. 
1953년 8월, 대처 부인은 쌍둥이 1남 1녀를 낳았다. 
같은 해 12월, 그녀는 순조롭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 대처 부인은 영국 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그녀는 처음으로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연금과 국민보험부 정무차관을 담당했다. 
그녀의 기세등등하고 세심한 사고가 드러나는 연설은 반대파들마저 그녀를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1970년, 대처 부인은 교육부장관에 임명되어 보수당 역사상 두 번째로 여성 장관이 되었다. 
1975년에는 주 경쟁 대상을 물리치고 보수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가 되었다. 
그녀는 얼마 후 '철의 여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79년 5월 4일, 대처 부인은 화이트 홀로 들어가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수상이 되었다. 

대처 수상은 집권 초기에 적극적인 경제 조치를 채택하며 영국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차츰 극복해 나갔다. 
그녀는 1981년에 영국의 공업 생산액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로 올려놓았다. 
아울러 통화 팽창률을 대폭적으로 낮춰 놓았다. 
기타 내정과 외교부문에서 대처 수상은 유럽공동체의 회비 문제, 영소 관계 문제 등에서 강경 태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포틀랜드 전쟁에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대처 수상은 1984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연임에 성공했다. 
그녀는 임기 동안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국유기업의 사유화 정책 등을 실시하여 '대처 부인의 기적'을 낳으며 경제를 안정시켰다. 

대처 수상은 임기 기간 중 자랑스러운 성과를 많이 이루어 냈지만 모순 또한 적지 않았다. 
1990년 11월, 대처 수상은 11년간 함께 했던 수상 자리를 아쉽게 내놓으며 자신의 정치생애를 마감했다. 
1992년 6월, 대처 부인은 남작 작위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1993년 5월, 그녀는 윌리엄&메리 칼리지의 21대 명예총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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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F. 케네디, 아폴로 달 착륙 계획을 세운 미국 대통령, 저격범, 암살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존F. 케네디
입니다 :)

 

존F. 케네디, 아폴로 달 착륙 계획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존F. 케네디, 아폴로 달 착륙 계획을 세운 미국 대통령

 

생몰년 : 1917~1963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메사추세츠주 브루클린
성    격 : 과단성, 낙관적, 완강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명문가 출신, 부친은 백만장자이며 어머니는 보스턴 사장의 딸임 

조지프 케네디 부부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은 그에게 훌륭한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었으나 어릴 적 케네디의 성적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1935년, 케네디의 아버지는 그를 런던경제대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으나 얼마 후 황달에 걸려 학업을 멈추고 돌아와야 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갔지만 얼마 후 다시 황달에 걸려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다. 후에 그는 다시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 
1939년, 케네디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주 영국 대사인 아버지 덕분에 수많은 유럽 각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케네디는 《뮌헨의 타협》이란 제목으로 졸업논문을 써서 영국이 당시 파시즘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편 원인을 분석했다. 
논문은 각계의 호평을 얻었고 그 후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했다. 
1940년 케네디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네디는 미국 해군에 들어갔다. 
그는 1943년 3월 어뢰정 중위 함장으로 임명되어 태평양의 솔로몬 군도에서 근무했다. 
8월의 2차 세계대전에서 그가 지휘한 어뢰정이 일본의 구축함과 충돌해 침몰하게 되었다. 
그때 케네디는 생존자 11명을 인솔해 위기로부터 잘 빠져나와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45년 케네디는 퇴역한 후 신문기자로 잠시 일했다. 
1946년 그는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 국회 하원의원 경선에 나갔고 단번에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1952년 그는 상원의원이 되었고 두 차례 연임했다. 

1960년, 케네디는 대통령 총선에 참여해 극렬한 경쟁 끝에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가 되었다. 
그의 상대는 공화당의 R. M, 닉슨이었다. 
케네디는 4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자신의 유머와 기지, 자신감을 발휘해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결국 그는 닉슨을 누르고 승리하여 20세기에 탄생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는 집권한 후 내정 면에서 수많은 계획들을 제기했다. 
'도시 주택 조건 개선', '교육 발전', '농업 지지', '종족 멸시 반대', '흑인에게도 평등과 권리를 주자'는 것 등이었다. 
케네디는 '실력으로 평화를 구하자' 고 외치며, 미국이 첨단 무기 개발과 지역 통제 등 여러 방면에서 초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도록 힘껏 노력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세계 주요 외교 군사 사건들이 발생했다.


1961년 4월, 미국 중앙정보국이 훈련하고 지휘한 고용군 비행기와 군함의 엄호 하에 쿠바를 침공했으나 전군이 전멸, 
'특종 전쟁' 계획, 베트남에서의 군사 행동 확대,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 중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도록 후루시초프와 협상'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과 함께 텍사스수 댈러스시에서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에 저격범의 권총 습격을 받아 46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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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페르미
입니다 :)

 

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생몰년 : 1901~1954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성    격 : 정직, 겸손, 근면 
신    분 : 과학가 
가    정 : 부친은 철도국 국장,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페르미가 태어난 후 그의 부모는 경제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그를 시골로 보냈다. 
3세 때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온 페르미는 이후 자신보다 한 살 많던 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함께 놀았다. 
그들은 물리를 공부하거나 전력 발동기, 모형 비행기 등을 만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형은 열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1918년 페르미는 이탈리아의 최고 학부인 피사대학에 입학했다. 
페르미는 대학 1학년 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했다. 
1922년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M. 보른을 따라 일했다. 
후에 또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에서 P. 에렌페스트를 따라 근무했다. 
1924년, 페르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 대학과 피렌체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때, 그는 양자론 영역에서 같은 양자 안에는 두 개의 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1927년 그는 '페르미-디랙 통계' 원리를 근거로 원자구조의 모형을 제안했다. 

페르미는 1928년에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은 유태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유태인 정책은 독일만큼 심하진 않았어도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유태인을 박해했다. 
페르미는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집은 이미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갈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페르미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에 상을 수상하러 간다는 기회를 빌려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페르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39년, 우라늄 원자핵의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한 페르미는 핵분열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찾는 일에 착수했다. 
페르미는 조수들을 인솔해 1942년 12월 2일 시카고 대학에서 최초도 제어된 연쇄 반응의 원자로로 임계상태에 도달하여 핵분열 연쇄 반응식을 실현했다. 
그의 성과는 원자력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어서 페르미는 원자폭탄의 연구제작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우수한 과학자 100명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 연구계획에 참가할 과학자들은 반드시 미국 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페르미도 이때 아인슈타인의 권유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6일 새벽, 최초의 원자폭탄이 뉴멕시코주의 앨러머 고도에서 원폭실험에 성공하여 거대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페르미는 원자력이 전쟁에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1946년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입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빠져들었다. 
1951년, 페르미는 그의 연구팀과 함께 세계최초로 핵자공진태(양성자와 중성자의 고유한 주파수 모양)를 발견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원자력위원회에 총 5만 달러에 달하는 장학금을 설립하고 원자력 평화에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장려했다. 
페르미는 이 상의 첫 번째 수여자가 되었다. 

페르미는 만년에 원자력의 의학 응용에 대해서도 연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과 이별해야만 했다.  
1954년 11월 29년 그는 시카고에서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페르미의 죽음은 세계 물리학계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20세기 물리학자 중 페르미처럼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 두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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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동양의 미를 찾아낸 근대 일본 작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가와바타
입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동양의 미를 찾아낸 근대 일본 작가

 

생몰년 : 1899~1972년  
국  적 : 일본  
출생지 : 오사카 
성  격 : 괴팍, 자유분방, 우울 
신  분 : 문학가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야스나리는 어려서 외롭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는 세 살 때 부모님께서 연속해서 돌아가신 탓에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댁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생활은 궁핍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고독과 빈곤한 생활은 오히려 그의 잠재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모조리 읽어치웠다. 
우수한 성적으로 도교 제1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대량의 일본 고전 등을 읽으며 잡지사에 글을 보내기도 했다. 
1920년, 그는 도쿄 제국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일본 문학을 공부했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자신의 문학 창작 생애를 시작했다. 

야스나리는 작가들과 함께 동인지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라는 문학사조를 세웠다. 
그는 국민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전통적 종교를 문학으로 대치하고자 했다. 
1926년, 그는 《이즈의 무희》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년 소녀의 순수한 연정을 명랑하고 산뜻한 필치로 세세히 그려내어 출판된 후 호평을 받았다. 
1965년, 야스나리는 이즈 반도에 아예 전문적인 '이즈의 무희' 기념비를 세웠다. 

1935년, 야스나리는 그의 대표작인 《설국》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1930년대 말 일본 게이샤(geisha, 일본 기생)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시마무라는 남자와 게이샤 고마코, 요오코 사이의 애정 갈등을 그린 것이다.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하는 여인들의 비참한 처지와 그녀들의 이상 세계를 향한 염원과 동경을 담아냈다.

이 책은 세계 문학 명저로 비록 10만여 글자밖에 되지 않는 중편소설이지만 12년에 걸쳐 창작되었다. 
소설은 일본의 전쟁 전과 후의 두 시대를 뛰어넘으며 예술적 감염성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등 각종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9년, 야스나리는 소설 《천마리 학을 쓰기 시작해 2년 후인 1951년에 일본 예술원상을 받았다. 
1957년, 그는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어 일본예술원 장려금과 일본 정부가 하달한 문화훈장을 받았다.

야스나리는 1962년에 또 다른 역작인 《고도》로 이름을 떨쳤다. 
이 소설은 독특한 창작 방식으로 일본 전통문화와 산천의 아름다움을 주인공의 삶과 함께 조화롭게 표현해 냈다. 
작가의 미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과 추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8년 10월 18일, 야스나리는 《설국》과 《고도》 등의 뛰어난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인도의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탄 아시아 작가가 되었다. 
수상식에서 그는 《아름다운 일본과 나》를 연설하여 서양 문학과는 다른 동양 문학의 심미적 체험을 들려주었다. 
야스나리는 일본 고전 문학의 영향 외에도 불교 선종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문학의 자서전에서 일찍이 불교가 세계 최대의 문학임을 제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교 경전은 종교의 준칙이 아니며 자신 발행한 야스나리의 두상이 그려진 의 창작 사상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은 야스나리에게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번뇌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집에는 항상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지 않아 그는 매우 귀찮고 불편해했다.
그는 걸핏하면 부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집은 여관도 아니요, 나는 손님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잖소!" 
1972년 4월 16일, 야스나리는 액화 프로판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1962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말없이 죽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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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는 작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
입니다 :)

 

헤밍웨이,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는 작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헤밍웨이,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는 작가

 

생몰년 : 1889~1961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 
성  격 : 강건하고 호방하며 모험을 좋아함 
신  분 : 문학가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교사를 지냈음 

소년 시절의 헤밍웨이는 건강한 신체와 충만한 정신으로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그는 교내 수영부와 축구부 일원이었으며 교내신문의 편집부원과 고적대에서 첼로를 맡기도 했다. 

그는 191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캔자스로 가서 '스타' 지의 기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헤밍웨이는 적십자 구호활동에 참여해 이탈리아의 전장으로 가 참혹한 전쟁을 경험했다. 
그는 종전에서 중상을 입었는데 그의 몸에서 발견된 탄환 조각이 237개나 되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전쟁에서 용감히 싸워 미국과 이탈리아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21년에 결혼했고 같은 해 12월, 캐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파리 특파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작가인 스타인 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헤밍웨이가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 주었다. 
헤밍웨이는 '미망(迷妄)의 세대' 작가의 초기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차츰 함축되고 정제된 창작적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1922년, 헤밍웨이는 토론토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 첫 번째 저서인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으며 뛰어난 창작의 재능을 발휘했다. 
헤밍웨이는 1920년대에 단편소설 《우리들의 시대에》(1924), 《남자들만의 세계》(1927)와 장편소설《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 《봄의 격류》(1926) 및 《무기여 잘 있거라》(1929)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젊은이들의 전쟁 후 유럽에서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책의 젊은이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공허한 영혼의 고통을 해소하려 했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청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미망(迷妄)의 세대'의 모범적 작품이 되었다. 
이 책은 출판된 후 곧바로 10만 여 부가 팔렸으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가격의 판권에 팔려나갔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후 헤밍웨이는 4차례나 스페인으로 가서 전시상황을 보도하는가 하면 민주 두 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우기도 했다. 
1940년, 그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출판하여 다 한 번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1941년에 헤밍웨이의 저작은 이미 세계에서 1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40~50년대에 헤밍웨이의 작품은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었고 다수의 저작이 영화로 상영되었다. 
헤밍웨이는 언론이 만들어낸 호방하고 거리낌 없는 전기적 인물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첫 단편소설인 《우리들의 시대에》부터 시작해 줄곧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력의 정신을 추구했다. 
 이런 사상의 추구는 《노인과 바다》에서 최절정에 올랐다. 
이 작품은 1952년에 출판되었고 헤밍웨이에게 2년에 걸쳐 퓰리처상, 아카데미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헤밍웨이는 일생동안 호방하며 '굽히지 않는 신념'의 풍격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1961년 7월 2일,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신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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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샤를 드골
입니다 :)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샤를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생몰년 : 1890년~1970년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북프랑스의 릴 
성    격 : 과감하고 완강하며 고집스러움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시민 가정 출신. 부친은 철학교수이며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 

 

드골의 부친은 일찍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는 민족주의 감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드골은 이런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9년, 드골은 프랑스의 유명한 생시르 육군 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12년, 학교를 업한 후 드골은 페탱의 수하에서 소위를 지냈고 이듬해에 바로 중위로 승진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드골도 페탱을 따라 참전했다가 부상을 세 차례 입기도 했다. 
1916년에는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드골은 생시르 모교에서 군사 교관을 지냈고 페탱 원수의 막료를 역임했다. 
그는 또 《칼날》, 《직업 군인서》와 같은 군사 이론 서적을 썼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드골은 프랑스 제5군 기갑 사단장을 담당했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입한 후에는 제4기갑 사단장으로 독일군에 강력히 맞섰으나 실패의 국면을 만회하지는 못했다. 

1940년 6월 17일 페탱 원수는 프랑스군에게 저항을 멈추고 항복할 것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튿날 프랑스 국민들은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는 드골 장군입니다. 저는 현재 런던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는 저항의 불꽃을 꺼뜨려서는 안됩니다. 아니, 절대로 꺼질 수 없습니다." 드골은 곧 굴욕과 고통에 빠져 있는 프랑스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무장부대 창설을 계획했다. 
1943년 드골은 루즈벨트와 처질의 안배 하에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를 조직했으며 다음해에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44년 8월 24일, 드골은 연합군을 따라 파리로 귀환한 후 군권과 정권을 장상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각 당파간의 모순은 정부를 위기에 몰아넣었고 드골은 1946년 초에 사임했다. 
후에 그는 《전쟁회고록》을 집필했다.  
1958년,프랑스 제 4공화국이 위기에 빠지자 드골이 다시 나서 프랑스의 국가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초강대국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무장 발전을 견지해나갔다. 
또 미국의 '다각적 핵무장 계획'을 거절하고 유럽의 연합을 주장했다. 
'유럽의 유럽인에 의한 유럽' 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한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었다. 

드골은 10년 동안 프랑스를 이끌며 대통령직을 두 차례 연임했다. 
1969년 드골은 국가의 심각한 위기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70년 11월 19일, 그는 급성 심장병으로 향년 80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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