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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동양의 미를 찾아낸 근대 일본 작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가와바타
입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동양의 미를 찾아낸 근대 일본 작가

 

생몰년 : 1899~1972년  
국  적 : 일본  
출생지 : 오사카 
성  격 : 괴팍, 자유분방, 우울 
신  분 : 문학가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야스나리는 어려서 외롭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는 세 살 때 부모님께서 연속해서 돌아가신 탓에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댁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생활은 궁핍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고독과 빈곤한 생활은 오히려 그의 잠재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모조리 읽어치웠다. 
우수한 성적으로 도교 제1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대량의 일본 고전 등을 읽으며 잡지사에 글을 보내기도 했다. 
1920년, 그는 도쿄 제국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일본 문학을 공부했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자신의 문학 창작 생애를 시작했다. 

야스나리는 작가들과 함께 동인지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라는 문학사조를 세웠다. 
그는 국민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전통적 종교를 문학으로 대치하고자 했다. 
1926년, 그는 《이즈의 무희》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년 소녀의 순수한 연정을 명랑하고 산뜻한 필치로 세세히 그려내어 출판된 후 호평을 받았다. 
1965년, 야스나리는 이즈 반도에 아예 전문적인 '이즈의 무희' 기념비를 세웠다. 

1935년, 야스나리는 그의 대표작인 《설국》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1930년대 말 일본 게이샤(geisha, 일본 기생)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시마무라는 남자와 게이샤 고마코, 요오코 사이의 애정 갈등을 그린 것이다.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하는 여인들의 비참한 처지와 그녀들의 이상 세계를 향한 염원과 동경을 담아냈다.

이 책은 세계 문학 명저로 비록 10만여 글자밖에 되지 않는 중편소설이지만 12년에 걸쳐 창작되었다. 
소설은 일본의 전쟁 전과 후의 두 시대를 뛰어넘으며 예술적 감염성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등 각종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9년, 야스나리는 소설 《천마리 학을 쓰기 시작해 2년 후인 1951년에 일본 예술원상을 받았다. 
1957년, 그는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어 일본예술원 장려금과 일본 정부가 하달한 문화훈장을 받았다.

야스나리는 1962년에 또 다른 역작인 《고도》로 이름을 떨쳤다. 
이 소설은 독특한 창작 방식으로 일본 전통문화와 산천의 아름다움을 주인공의 삶과 함께 조화롭게 표현해 냈다. 
작가의 미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과 추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8년 10월 18일, 야스나리는 《설국》과 《고도》 등의 뛰어난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인도의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탄 아시아 작가가 되었다. 
수상식에서 그는 《아름다운 일본과 나》를 연설하여 서양 문학과는 다른 동양 문학의 심미적 체험을 들려주었다. 
야스나리는 일본 고전 문학의 영향 외에도 불교 선종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문학의 자서전에서 일찍이 불교가 세계 최대의 문학임을 제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교 경전은 종교의 준칙이 아니며 자신 발행한 야스나리의 두상이 그려진 의 창작 사상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은 야스나리에게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번뇌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집에는 항상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지 않아 그는 매우 귀찮고 불편해했다.
그는 걸핏하면 부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집은 여관도 아니요, 나는 손님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잖소!" 
1972년 4월 16일, 야스나리는 액화 프로판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1962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말없이 죽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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