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페르미
입니다 :)

 

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페르미, 최초의 원자로 설계자

 

생몰년 : 1901~1954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성    격 : 정직, 겸손, 근면 
신    분 : 과학가 
가    정 : 부친은 철도국 국장,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페르미가 태어난 후 그의 부모는 경제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그를 시골로 보냈다. 
3세 때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온 페르미는 이후 자신보다 한 살 많던 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함께 놀았다. 
그들은 물리를 공부하거나 전력 발동기, 모형 비행기 등을 만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형은 열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1918년 페르미는 이탈리아의 최고 학부인 피사대학에 입학했다. 
페르미는 대학 1학년 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했다. 
1922년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M. 보른을 따라 일했다. 
후에 또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에서 P. 에렌페스트를 따라 근무했다. 
1924년, 페르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 대학과 피렌체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때, 그는 양자론 영역에서 같은 양자 안에는 두 개의 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1927년 그는 '페르미-디랙 통계' 원리를 근거로 원자구조의 모형을 제안했다. 

페르미는 1928년에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은 유태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유태인 정책은 독일만큼 심하진 않았어도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유태인을 박해했다. 
페르미는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집은 이미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갈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페르미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에 상을 수상하러 간다는 기회를 빌려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페르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39년, 우라늄 원자핵의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한 페르미는 핵분열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찾는 일에 착수했다. 
페르미는 조수들을 인솔해 1942년 12월 2일 시카고 대학에서 최초도 제어된 연쇄 반응의 원자로로 임계상태에 도달하여 핵분열 연쇄 반응식을 실현했다. 
그의 성과는 원자력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어서 페르미는 원자폭탄의 연구제작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우수한 과학자 100명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 연구계획에 참가할 과학자들은 반드시 미국 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페르미도 이때 아인슈타인의 권유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6일 새벽, 최초의 원자폭탄이 뉴멕시코주의 앨러머 고도에서 원폭실험에 성공하여 거대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페르미는 원자력이 전쟁에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1946년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입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빠져들었다. 
1951년, 페르미는 그의 연구팀과 함께 세계최초로 핵자공진태(양성자와 중성자의 고유한 주파수 모양)를 발견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원자력위원회에 총 5만 달러에 달하는 장학금을 설립하고 원자력 평화에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장려했다. 
페르미는 이 상의 첫 번째 수여자가 되었다. 

페르미는 만년에 원자력의 의학 응용에 대해서도 연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과 이별해야만 했다.  
1954년 11월 29년 그는 시카고에서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페르미의 죽음은 세계 물리학계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20세기 물리학자 중 페르미처럼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 두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