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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독일의 '철의 재상'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비스마르크
입니다 :)

 

비스마르크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비스마르크, '철의 재상'

 

생몰년: 1815~1898년
국  적: 독일 
출생지: 프로이센의 쇤하우젠
성 격 : 냉혹하며 의지력이 강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귀족 가문 출신, 아버지는 정부의 관원이었음

비스마르크는 천성적으로 총명하여 학업성적 또한 우수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난폭한 성격으로 늘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는 1832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갔고 1년 반 뒤에는 베를린 대학으로 전입해 법률을 전공했다. 그는 역사와 외국어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대학 시절의 그는 친구들과 28차례나 싸운 기록이 있다. 1835년 비스마르크는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 법원에서 견습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근본적으로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늘 업무 시간에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가고는 했다. 비스마르크는 1847년에 결혼했는데 부인은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점차 과거의 악습을 버리고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

 

결혼한 얼마 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연방의회의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차츰 정치 신념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가장 좋은 정부 형식은 전제군주정만한 것이 없으며, 독일 연방은 반드시 프로이센이 통일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9년, 비스마르크는 주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었고 1861년에는 주 프랑스 공사를 맡았다. 1862년, 그는 프로이센 수상 및 외교 대신이 되었다. 며칠 후,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유명한 '철혈정책'을 제시했다.

 

즉, '재의 중대한 문제는 공허한 빈말이나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철과 피로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은 이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그는 무력이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정치적 문제란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독일 연방의 통일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세 차례의 왕조 전쟁으로 통일 독일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첫 번째는 1864년 프로이센과 덴마크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덴마크에 속해 있던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의 두 공국(주민은 대부분 독일 연방 사람이었다)을 독일로 편입시켰다. 두번째는 1866년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몰아내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북부 독일 연방을 세우며 독일 연방의 북부와 중부를 통일했다. 세 번째는 1870년 프로이센 대 프랑스 전쟁(보블전쟁이라고도 한다)이었다. 이 전쟁으로 남부 통일을 저해하던 요소를 없애고 독일은 유럽에서 우뚝 일어서게 되었다. 강대국 프랑스는 스당전투에서 맥없이 무너졌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혔으며 파리는 프로이센군이 점령했다. 1871년 1월 18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통일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프로이센국왕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수상이 되어 공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19세기 하반기 유럽정치 무대의 풍운아로 등장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한 후 안으로는 경제 발전에, 밖으로는 유리한 국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또한 해외 진출을 꾀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1858년,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야심만만하고 외고집인 사람이었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정책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하는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1890년 3월,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비스마르크는 28년 만에 정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1898년 3월 18일 비스마르크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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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황제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입니다 :)

 

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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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황제

 

생몰년: 서기전 274~337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세르비아의 나이수스 
성 격 : 기지가 넘치며 냉혹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는 어렸을 때 교육받을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그는 일찌감치 종군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의 전투에서 용맹함과 기지를 발휘하며 고급 장교를 지냈다. 
갈레리우스가 로마 황제를 계승한 후 콘스탄티누스를 자기 곁에 인질로 잡아두며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의 곁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브리튼 전투를 치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당시 갈리아 군대는 그의 아버지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재능 있고 용감하며 활력이 넘치는 이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6년, 그의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죽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카이사르'로 추대하고 그를 '아우구스투스' 로 선포했다. 
이후에 콘스탄티누스는 6년 동안 그의 정적들과 투쟁을 벌여 312년,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를 자칭하던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했다. 
또한 원래 막센티우스의 관할이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하여 명실상부한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발칸 반도와 이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다른 아우구스투스인 리키니우스와 밀란에서 회합을 가지고 '밀라노 칙령' 에 사인했다. 

그로써 기독교도와 기타 이교도들이 동등한 종교적 자유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그간 몰수된 예배당과 교회재산을 되돌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나아가 국가 정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에 끊이지 않는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323년, 리키니우스를 물리쳤다. 
아울러 이듬해 반란을 기도하고 이민족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사형시켰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다시 통일제국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틴을 수도로 정식 선포했다. 
이는 로마 공화국 제도의 전통을 버리고 군주 전제 제도를 확립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비잔틴은 대형토목 공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이라 명명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성'이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1453년까지의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줄곧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런 이유로 당시의 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 이라 부르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보호하여 그 영향력이 제국 내에서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는 모두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백여 년도 채 안되어 제국 내 토지의 1/10이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현명한 외교 정책으로 수완을 발휘해 제국을 보호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제창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대학을 세워 국가적으로 교수를 초빙하고 그리스어, 라틴어, 문학, 철학, 수사학과 법률을 가르치며 국가의 인재 양성소로 삼았다. 
그는 또한 각 도시의 의사와 교사의 권리를 확대시키고 각지에 학교를 짓도록 명령했으며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학업을 독려했다. 
예술가에게는 공민의 의무를 면해주어 예술 연구와 전수에 힘쓸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통치기간 동안 기독교를 국교로 세우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했지만 스스로가 기독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야 비로소 생의 죄악을 씻어버리기 위해 목사를 불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예순네 살의 '피로로 지친' 이 군주는 보라색의 황제 옷을 벗어버리고 처음으로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입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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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대제, 신성 로마제국의 창건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샤를마뉴 대제
입니다 :)

 

 

샤를마뉴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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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대제, 신성 로마제국의 창건자

 

생몰년 : 742~814년 
국  적 : 프랑크왕국 
출생지 : 로마 
성  격 : 너그러움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아버지는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 피핀 

샤를마뉴(또는 샤를이라고 불리기도 함)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기독교에 대해 경건하고 정성스러웠으나 훌륭한 문화적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아버지 피핀이 751년 카롤링거 왕조를 창립했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768년 그의 아버지는 부종으로 파리에서 죽고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두 아들만을 남겼다. 
프랑크인들은 민중대회를 열어 이 두 아들을 국왕으로 삼고 국토를 양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카를로만은 국왕의 권리를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결국 771년 모든 프랑크인들의 동의를 얻어 샤를마뉴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샤를마뉴는 대규모 영토 확장을 감행하여 일생동안 50회의 원정을 벌였으며 그 중 30회는 친히 참전했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의 전쟁은 북방의 작센족을 정벌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772년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공격해 장장 33년의 전쟁 끝에 작센족을 정복하고 이들을 프랑크 신민으로 삼았다.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및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이로 인하여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로써 당시 서유럽에서 공전의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다. 

800년, 샤를마뉴는 로마로 진격해 로마 귀족에게 축출당한 교황 레오 3세를 도와주고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 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제국' 이 되었고 국왕을 '샤를마뉴 대제' 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고대 로마제국의 연속으로 보았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신성 로마제국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샤를마뉴는 기독교에 열성이었으며 경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교회와 수도원에 학업을 가르치도록 권장했다. 
또한 궁궐안에도 학원(궁정학원)을 세웠으며 널리 교사, 학자, 예술가들을 불러 강연을 열기도 했다. 
그는 일반인들 가운데서 아이들을 선발해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받도록 했다. 
심지어는 출신이 천하더라도 학업성적이 우수한 청년 전도사를 주교로 삼기도 했다. 
그는 아헨에 도읍을 정하고 난 후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휘황찬란한 궁전과 교회를 많이 지었다. 
이로 인해 건축이 발전하고 회화와 조각 같은 예술도 발전하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라틴문과 그리스문의 친필 원고를 수집하고 베껴 쓰도록 했다. 
그는 필사본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그는 글을 몰랐다고 함) 후대를 위해 수많은 고전 작가의 저작들을 남겨주었다. 

샤를마뉴는 814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43년, 그의 세 손자가 각기 왕이 되어 제국을 셋으로 나누었다. 
동 프랑크는 이후에 독일이 되었고 서 프랑크는 프랑스가 되었다. 
또 동부와 서부의 중간 지역은 이탈리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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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 팍스로마나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우구스투스
입니다 :)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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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

 

생몰년: 서기전 63~14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로마 
성 격 : 지혜롭고 과단성 있음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아버지 옥타비우스는 원로원 원로였음 

아우구스투스의 원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다. 
아우구스투스란 로마 원로원에서 그에게 수여한 존칭으로 '신성하고 장엄하며 위대하다' 는 뜻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개가하여 계부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열두 살에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바쳤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열아홉살에 아폴로니아(지금의 알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카이사르를 위해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 일대)로 원정 떠날 준비를 했다. 
카이사르는 유서에 자신의 재산 가운데 3/4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라고 명시했고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남긴 특별한 은총과 그의 영향력을 이용해 로마의 통치권을 모색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카이사르의 수석 보좌관이며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권리를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제1후계자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가 예상에서 벗어나자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재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에 옥타비아누스는 일련의 정치, 군사적 행동을 통해 서기전 29년에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장기간의 내전으로 인해 분열되었던 로마를 다시 통일했다. 
그는 개선하여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개선한 이후 '원로원 수석 공민 (즉 원수)과 '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서기전 28년에는 로마의 집정판으로 당선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와 다른 점은 공화정부의 형식 아래서 실질적인 독재 통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로마를 42년간이나 다스릴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서기전 27년 1월 13일, 그는 원로원 회의를 열어 독재권을 내놓고 '공화정' 으로 돌아갈 것을 선포했다. 
이에 감동한 원로원은 3일후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신성) 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공화국 원칙에 위배되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어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서기전 13년, 옥타비아누스는 제사장에 당선되어 로마 종교의 수뇌가 되었다. 
이렇게 그는 군사, 행정, 사법과 종교에 이르는 대권을 모두 관장하게 되었으니 나이 50에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제를 시행하였으며 로마의 각 행과 성을 원로원의 임명을 받은 총독이 관할하게 하는 원로원 행정구역과 직속 행정구역을 두었다. 
동시에 카이사르의 제도를 계승해 각 행정구역에 자치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해당 지역의 상위 계급에게 공민권을 주었다. 
또한 대규모의 퇴역 병사들을 이주해 거주시킴으로써 전국 각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신생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사라져버린 옛 풍속을 살리고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또한 나날이 와해되어 가는 로마의 가정을 되살리기 위해 출산을 장려하고 옛 종교 의식과 로마의 전통 풍습을 복구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로마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일부 평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어 로마와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외교 방면으로는 강력한 정규상비군을 건립하여 갈리아와 스페인을 완전 정복했다. 
라인강에서 엘베강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점령했으며 지중해를 로마에 속하는 호수로 만들며 제국의 영토를 넓혔다. 

서기전 14년, 아우구스투스는 남부 이탈리아를 순시하다 7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가 개척한 로마 제국은 후에 '로마의 지배에 따른 평화' (Pax Romana 팍스 로마나)라고 불린 장장 200년에 걸친 안정적인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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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입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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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생몰년: 서기전 100~44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로마성 밖의 농장 
성 격 : 포부가 원대하고 용맹하여 지략이 뛰어났음 
신 분 :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가 정 : 로마 귀족 율리우스의 후예 


카이사르는 고대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젊어서 급작스럽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로마의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업적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넘어선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소년기에 이미 비범한 포부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급변하는 로마 공화국에서 큰 업적을 세우고자 했다. 
서기전 84년, 카이사르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콘스탄틴과 결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와 이혼하고 평민당 지도자인 곡시우스 코르넬리우스 신나의 딸 코넬리아를 아내로 맞았다. 
슐라가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정적 신나를 죽이자 그는 젊은 카이사르의 재능을 높이 사 코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권했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했다. 
슐라는 이에 화를 내며 카이사르가 물려받은 재산과 그의 지참금까지 몰수하고 그를 처형하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이 소문을 듣고 로마를 떠나 서기전 78년 슐라가 죽은 후에야 고향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이후 카이사르는 신속히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웅변과 강개함, 열정적으로 공무에 임하는 태도와 개혁파의 모습으로 대중의 호감을 샀다. 
또한 평민과 일부 상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도 널리 이름을 날렸다. 
서기전 73년 그는 최고 제사장에 뽑혔고 이후 재정관, 시정관, 대제사장, 대법관 등 고위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서기전 60년 로마 집정관의 폼페이우스, 크라소스와 결성해 '삼두 동맹' 을 결성했다. 
이 두 사람의 지지로 카이사르는 서기전 59년 로마 집정관(콘술)의 자리에 올랐고 임기가 만료된 후에는 갈리아(켈트) 총독을 맡았다.(서기전 58~51년) 
갈리아 총독 재임시 카이사르는 전쟁에 능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냈다. 
이 군대는 갈리아 전역을 정복했고 라인강(당시 이름 레누스 강)을 넘어서 게르만 지역까지 공격했다. 
또한 두 번에 걸쳐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 섬을 침략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해 원로원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크라소스가 죽은 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모의하여 카이사르의 군권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카이사르는 이에 무력으로 맞서기로 결정하고 5년간의 내전을 거쳐(서기전 49~45년), 폼페이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정적을 제거하고 로마 전역을 정복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독재자로 선포하고 최고의 정치권력을 획득했으며 군주라는 칭호가 없는 군주가 되었다. (군주라는 칭호는 없었지만 사실상 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제도와 공민권, 통치 법규와 정치체제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고도로 집중된 중앙집권제를 완성하고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대제국을 세웠다. 
이 중 몇 가지 조치는 후대에 미친 영향이 자못 컸다. 

그는 일찍이 벽에 로마에서 발생한 중대사와 원로원 회의의 보고서를 쓰도록 했는데 이것은 현대 신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도해 제작한 카이사르 달력(율리우스 달력이라고도 함, 이집트인이 쓰던 달력을 고쳐 만들었음)은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또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안 책력은 이 역법에 기초해서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의 많은 마차를 일방으로만 통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현대 교통 관리의 기원이 되고 있다. 
또한 그가 쓴 <갈리아 전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갈리아와 라인강 동쪽 유역의 지리, 풍속 등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카이사르의 권력 독점에 대해 원로원의 귀족 세력들은 시종 불만을 품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56세 되던 서기전 44년, 결국 이들은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죽이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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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왕, 인도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소카왕
입니다 :)

 

아소카왕, 인도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소카왕, 인도 역사상 가장 걸출 한 군주

 

생몰년: 서기전 269~232년 
국  적: 고대인도 
출생지: 중인도 마가다국 
성 격 : 악을 배척하고 석을 숭배함, 불심이 깊었음 
가 정 : 아버지는 마우리아 왕조의 2대왕 빈두사라 


아소카는 고대 인도 마가다국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이다. 
그의 조부인 찬드라굽타는 백성을 이끌어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며 난다왕조의 통치를 마감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아버지 빈두사라는 제2대왕으로 아소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오늘로서 고민이 사라졌다.' 라고 해서 아소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소카'는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소카는 무우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소카왕은 열여덟 살에 아반띠에서 총독을 역임했으며 택차실라의 1차 반란을 진압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서기전 273년 빈두사라가 병으로 세상을 뜬 후 99명의 형제자매를 죽이고서야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4년이 지나서야 등극식을 거행하고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아소카는 왕위에 등극한 후 즉시 해외로 영토 확장을 꾀했다. 
그는 습파살 국을 정복했으나 가장 규모가 큰 정복전은 칼링가 원정이었다. 
칼링가는 벵골만 연안의 국가였는데 군사력이 강하고 해외 무역이 발달해서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곳이었다. 
아소카 왕은 바로 이 점을 탐냈던 것이다. 
약 서기전 262년, 아소카는 칼링가에 대규모 진격을 감행하여 그 나라를 정복했다. 
아소카왕의 통치시기에 남아시아 대륙의 일부는 아무리아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고대인도 역사상 유래없는 일이었다. 

아소카는 어려서부터 부처님이 성불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즉위 후 참혹한 전쟁 등을 겪으면서 그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쟁에 대해 깊이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차츰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소카는 칼링가 전투 이후 곧 불교 고승과 여러 차례에 걸쳐 긴 이야기를 나눈 후 불교에 귀의했다. 
그때부터 아소카왕의 대내외적인 정책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칼링가 백성들에게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준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회한을 느낀다' 고 말했다. 
이후 그는 인근 국가에 용맹한 군대를 보내는 대신 고승들을 보내 '전쟁의 북소리' 를 '법의 소리' 로 바꾸었다. 
그가 말하는 '법' 이란 불교의 이념과 도덕관을 기초로 인애의 실천과 경건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아소카는 불법을 신봉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행동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우선 자신의 가정에서 도덕을 실천하기를 희망했다. 
아소카는 이를 몸소 실천해 궁전과 온 나라에서 피비린내 나는 오락을 금했으며 동물을 죽여 제사 지내는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불교는 짧은 시간 안에 인도의 국교로 선포되었다. 
아소카왕은 왕궁과 인도 각지에 석주를 세우고 석벽을 파도록 하고 그 위에 조령(사후 일정 기간이 지난 자의 생생한 영혼)을 새기도록 했다. 
그는 또한 불교 고승들을 불러들여 불교경전을 편집, 정리하도록 했으며 각지에 많은 사원을 세웠다. 
또한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왕자와 공주를 포함해 수많은 사절과 승려들을 인근 국가나 지역으로 보내 포교 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약 서기전 253년 그의 도움 하에 화씨성에서 유명한 제3차 결집이 있었다. 
이 결집에서 불교는 경, 논, 율의 세 가지를 완비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아소카 탑을 세우기도 했다. 
아소카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집트, 시리아, 미얀마, 중국에까지 전파되었고 결국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소카왕은 고대에서 가장 정사에 힘을 기울였던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을 위해 관개시설을 하고 도로를 닦았으며 병원을 세우는 등의 많은 일을 했다. 
아소카왕은 재위 4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높은 명망을 얻었다. 
인도와 기타 일부 국가의 역사가들은 그를 '위대한 아소카왕' 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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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 과학계 불후의 위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입니다 :)

 

아르키메데스, 과학계 불후의 위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르키메데스, 과학계 불후의 위인

 

아르키메데스, 과학계 불후의 위인 
생몰년: 약 서기전 287~212년 
국  적: 고대 그리스 
출생지: 시칠리아섬의 사라쿠사 
성 격 : 신중하고 지혜로움 
신 분 :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가 정 : 아버지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음   


서기전 287년, 이르키메데스는 사라쿠사 부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귀축집인이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지 못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르키메데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생각하고 변론하기에 능했다. 
또 수학과 천문학 특히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열한살이 되었을 때 왕실과의 친분 덕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혜의 도시' 로 불리던 이 도시에서 몇 년 동안 머물며 공부했다. 
그는 수많은 도서를 섭렵했고 순한 학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클리드의 제자 에리토스테이어스와 코논의 문하고 들어가 철학, 수학, 천문학에서 물리학 등을 함께 연구했다. 
그는 시라쿠사로 돌아온 후로도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과 연락하며 과학적인 연구 성과를 교류했다. 

아르키메데스는 과학영역에서 동시대 과학자들의 추앙을 받을 만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영역에서 '착출법' 을 이용해 포물선의 활꼴, 나선, 원형의 면적과 체적 및 타원구체, 포물면체 등 복잡한 기하체의 체적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미적분 계산의 시조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또 한이 방법으로 π(원주율)값을 추산해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얻어냈다. 
또한 그는 명수법을 발견했으며 이를 이용해서 수많은 수학의 난제를 해결했다. 
그의 주요한 수학 저서로는 <구와 원기 등에 대하여>, <코노이드(conoid)와 스페로이드(spheroid)>, <포물선의 구적>과 <소용돌이선에 대하여>가 있다. 
역학 영역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주로 정역학 과 유체역학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는 기계를 연구하던 중에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했고, 부체(물에 떠있는 물체)를 연구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이다. 
또한 그는<부체에 대하여>, <지렛대에 대하여>, <중심에 대하여> 등의 역학저서를 남겼다. 
천문학 영역에서 아르키메데스는 돌아가는 구를 이용해서 일식과 월식 현상을 설명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구가 둥근 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보다 무려 1800년이나 앞선 생각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과학적 발견을 실전에 응용하는 데도 열중했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기계를 설계, 제작하여 지렛대 외에도 기중 도르래, 관계기, 펌프 및 군사용 투사기 등을 만들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 펌프' 로 불리는 양수기는 현대의 나사 운반기의 전신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로마군이 시라쿠스를 침공했을 때 그는 동포들과 함께 많은 무기들을 제작했다. 
원거리 투척이 가능한 투석기, 적선을 휘둘러 던질 수 있는 기다랗게 생긴 기중기와 쇠로 된 갈고리 및 광원을 집중시켜 적선을 불태울 수 있는 초대형 볼록렌즈 등이었다. 
3년간이나 저지당하던 로마인들에 의해 성이 함락된 후 아르키메데스는 75세에 어느 로마 병사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시칠리아 섬에 묻혀 있으며 묘비에는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기하학에서 세운 위대한 공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수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를 '수학의 신' 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뉴턴과 가우스를 누르고 역사 이래 가장 훌륭한 수학자 3인 중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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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정복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알렉산더 대왕
입니다 :)

 

알렉산더 대왕,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정복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정복자

 

생몰년 : 서기전 356~323년 
국 적  : 마케도니아 
출생지 : 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 
성 격  : 의지력이 강함, 날카로우면서 과단성 있음 
신 분 : 정치가, 군사가 
가 정  :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국왕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는 어려서부터 세계를 제패하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왕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그로 인해 세계를 정복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열여섯 살부터 부왕을 따라 정벌에 나섰다. 

그는 유명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기병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적의 우익을 파고들어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서기전 336년, 필립포스 2세는 딸의 결혼식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후 알렉산더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당시 국제 정세는 긴장되어 필립포스 2세가 세운 그리스 연맹과 정복했던 북방의 속지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났다. 

알렉산더는 그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숱한 반란세력을 제압하고 그리스에서 차지하고 있는 마케도니아 패주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알렉산더는 내란을 평정하고 즉시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서기전 334년, 그는 보병 3만과 기병 5,000명, 전함 160척을 거느리고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그의 대군은 빠른 속도로 소아시아들 정복해 나갔다. 

서기전 333년 11월에는 길리키아의 아수스성 근처 피나루스강 유역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의 60만 군마와 유명한 '아수스 전투('아수스 평원의 전투' 라고도 함) 를 치렀다. 

전투가 시작되자 알렉산더는 정예병의 우측을 기병으로 제압하였고 병력을 재정비하고 맹렬한 기세로 적의 좌측을 공격한 후 바로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이로써 페르시아 군대는 완전히 궤멸했으며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 아내와 두 딸은 포로로 잡혔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화친을 거절하고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하며 지중해를 장악했다. 

또한 그는 이집트를 무혈점령하며 서기전331년 봄, 군대를 메소포타미아에 주둔시기고 페르시아 본토로 진격을 감행했다. 

같은 해 9월 옛 앗시리아의 수도 나네베 부근의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페르시아군은 군사가 백만에 도륜전차 200여대를 보유한 대군이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피신했으나 빅트리아의 총독인 베소스에 살해당했고 베소스는 오래지 않아 알렉산더에게 잡혀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페르시아 제국은 결국 알렉산더의 철기 아래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서기전 324년, 알렉산더는 바빌론으로 돌아옴으로써 원정을 마쳤다. 


알렉산더는 군사 정복을 통해 동으로 인더스강에서 서로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까지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는 적극적으로 제국내의 경제 및 문화교류를 촉진시컸다. 

알렉산더의 원정으로 많은 그리스의 학자들이 동방으로 유입되어 현지의 과학과 문화를 연구했다. 

이로써 동서 과학 문화의 상호 보완과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인들과 동방인들의 융합을 위해 결혼을 장려했으며 시범적으로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여러 가지 적극적인 조치들로 그리스는 흥성할 수 있었다. 

서기전 323년 6월 13일, 알렉산더는 다시 원정을 준비하다가 33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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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위대한 철학자이자 과학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생몰년 : 서기전 384~322년 
국 적  : 고대 그리스 
출생지 : 스타게이로스 성 
성 격 : 고집이 있으며 지혜로움 
신 분 : 사상가 
가 정 : 부친은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2세의 전의(왕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적이며 의학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은 의학 및 해부의 기술을 아들에게 교육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전의였으니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통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해야 했으나, 이러한 의학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그에게 과학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서기전 367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스승으로 삼고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 장장 20여 년 각종 지식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났으므로 플라톤은 그를 '아카데메이아의 (또는 예지의 화신이라고도 함) 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이 사망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아시아의 아소스로 갔다. 

그는 헤르메이아스의 궁전에 기거하면서 헤르메이아스의 질녀인(질녀이면서 동시에 양녀였다)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아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피티아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녀인 헤르필리스와 동거하면서 니코마코스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서기전 342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335년 마케도니아에서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갔다. 

그리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폴론 신전 근처의 숲에 학당을 열었는데,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더로부터 거액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늘 제자들과 숲 속의 산책로 페리파토스를 거닐며 철학을 논했기 때문에 소요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인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서 당시에 이미 알고 있던 학문의 영역들(논리학, 정치학, 경제학, 전략학, 수사학, 학, 의학)에 대해 비상한 지적 관심을 표출했다. 

또한 논리학과 생물학 등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굳이 과장하지 않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업적은 고대 그리스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창시자로서 귀납과 연역의 사유 방식을 도출해냈다. 

또한 동일률, 모순률, 그리고 배중률과 이들 사유의 기본 규율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규정하고 발견한 원직과 범주 및 그것들의 사용에 필요한 몇몇 전문 용어들은 지금까지도 논리 교재에서 쓰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절학 분야에서 객관 세계는 진실의 존재임을 확신했고 인류 이식의 근원은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인설(질료인, 작용인, 형상인, 목적인)'을 제시했는데, 이는 사물이 발생하고 움직이고 발전하는 것은 모두 이 네 가지 원인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학 분야에서 군주, 귀족, 공화, 참주, 과두와 평민의 여섯가지 정체를 상세하게 비교 설명했다. 

또 법치를 주장하며 '법률은 정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성이다'라고 했다. 

문학 방면에서는 미학, 문예 이론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 예를 들면 문예의 발생과 분류, 문예와 현실의 관계 등을 광범위하게 고찰했으며 문예는 심오한 사회적 의의를 지닌다고 여겼다. 


서기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병으로 죽고 나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저항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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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서양 정치 철학의 시조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플라톤
입니다 :)

 

플라톤, 서양 정치 철학의 시조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플라톤, 서양 정치 철학의 시조

 

플라톤, 서양 정치철학의 시조 

생몰년 : 서기전 427~347년 
국 적  : 고대 그리스 
출생지 : 아테네 
성 격 : 고집스러우며 강인하고 지혜로움 
신 분 : 철학자, 사상가 
가 정 : 귀족집안 출신 

 

 

플라톤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인데 태어나면서부터 넓은 어깨(혹은 넓은 이마라고도 한다)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플라톤' 이란 그리스어로 '넓다' 또는 '평평하다' 라는 뜻이다.)  

플라톤은 젊은시절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당시 유행하던 각종 학설을 접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이 예순 살의 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철학 연구의 기나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민 특히 급진 민주세력의 맹렬한 공격을 받던 소크라테스의 열정적인 탐구정신은 플라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서기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민주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플라톤은 깊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무리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아테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약 스물여덟 살에서 마흔 살에 해외를 유랑하면서 수학자, 사상가, 정치가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통해 점점 자신의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서기전 386년, 플라톤은 아테네로 돌아와 아테네 근교의 아카데미 체육장에 학원 아카데미아를 열었다. 

그는 제자들을 모집하여 철학을 가르치며 저작 활동에 열중했고 가르치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다. 


플라톤의 주요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국가론>, <폴리티코스>, <파이돈> 등이 있다. 

플라톤은 주로 대화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쳤는데 대화의 주인공은 바로 스승인 소크라테스였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현실계 위에는 감각적 경험에 의한 세계를 초월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 이데아(idea)의 세계가 제1성이며 현실세계는 제2성이다. 

현실세계는 가변적인 것이라 이데아의 세계에만 영원불변한 진실이 존재한다. 


플라톤은 정치적으로는 귀족 정치를 옹호했으며 민주 정치에 반대했다. 

플라톤의 정치적 특징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론>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거대한 한 개인으로 보았으며, 개인은 국가의 축소된 형태라고 생각했다. 

이때 개인은 지혜(절제의 세 가지 덕목을 갖춘다. 

국가에도 각기 다른 덕목을 갖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현명한 통치자 계급이며 둘째는 용감히 방위를 맡은 군인 계급이다. 

셋째는 나면서부터 '절제' 의 미덕을 가지는 농부, 공인, 상인 계급이며 이들은 앞선 두 계급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이 세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조화를 이루면 정의가 실천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것은 권력을 지닌 자는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을 가진 자는 권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적 국면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사상은 고대 스파르타의 과두정치를 근본으로 한 것으로 주 정치의 전통을 가진 아테네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플라톤은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나 받아들여 지지는 못했다. 

서기전 347년, 플라톤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은 서양 철학사상 최초로 경험론을 체계화한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중세 유럽 기독교 문명 및 근대의 여러 유심론과 경험론 영웅주의 사관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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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페리클레스
입니다 :)

 

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가 

생몰년 : 서기전 495~426년 
국 적  : 고대 그리스 
출생지 : 아테네 
성 격 : 우아하며 지혜와 용기를 겸비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부친은 아테네 함대의 사령관 

페리클레스는 귀족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육, 문에, 철학, 옹변술 심지어는 칠현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등의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청년 시절에 그리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싸웠고 결국 강력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나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아테네 공민으로서의 자부심의 발로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정치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자질을 발휘했다. 


서기전 466년을 전후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파의 수령인 에피알테스를 따라 아테네 민주파의 주요한 대표자로 발돋움했다. 

에피알테스가 아테네 귀족파에 의해 피살된 뒤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파와 국가 정권의 주요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서기전 443년부터 그는 연속 15년간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관직인스 토라테고스(장군직)에 당선되어 국가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페리클레스는 집정기간에 오로지 아테네의 번영과 영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페리클레스의 황금시기' 로 일컬어진다. 


이 시기에 아테네는 내정방면에서 민주정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법률상 최고 권력기관으로 매년 2~4회 개최되었으며 시민들은 빈부 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20세 이상이면 선거권을 가졌다. 

페리클레스의 노력으로 아테네 민회는 일련의 법령과 조치를 통과시켰으며 민회를 국가최고 권력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시민들에게 각종 관직을 개방하고 공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수당을 제공했다. 

이로써 아테네의 국가 제도는 민주화를 표방할 수 있었다. 

대외 정책 방면에서 페리클레스는 해상 역량의 강화에 힘써 대외 무역을 확대시켰으며, 아테네와 그리스 반도의 세력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문화면에서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고전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의 집권 시기에 그리스의 유명한 학자, 문인 등 예술 대가들은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강의를 하고 진선미를 추구했으며 우주의 오묘함과 인간 삶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진력했다. 


서기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서 스파르타의 대군이 아테네를 침략해 들어왔다. 

전쟁의 패배와 급작스러운 역병으로 페리클레스는 정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서기전 430년 스토라테고스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공금 남용으로 기소되어 벌금형에 처해졌다. 

서기전 429년 페리클레스는 다시 스토라테고스에 당선되었지만 곧 페스트로 병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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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킬로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아버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이스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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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킬로스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이스킬로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의 아버지'

 

생몰년 : 서기전 525~456년 
국 적  : 고대 그리스 
출생지 : 아테네 
성 격 : 굳세고 나라를 사랑하며 정의감으로 충만했음 
신 분 : 극작가 
가 정 : 귀족집안 출신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희곡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서기전 499년,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자신의 첫 번째 극본을 완성하여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서기490년, 아이스킬로스와 그의 두 형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 참가했다. 

아테네 정부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운 두 형제의 공적을 높이 칭송했다. 

서기전 484년, 아이스킬로스는 처음으로 비극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그가 일생을 통해 받은 수많은 우승 경력의 화려한 시작이었다. 

서기전 456년 그는 3부작 <오레스테이아>로 최후의 우승 기록을 장식했다. 


아이스킬로스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진정한 창시자이다. 

그는 디오니소스 축제(고대 그리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로마신화의 바쿠스]를 기리던 축제)에서 주신에게 바치던 합창 찬가에 한 명의 배우를 더해 순수 합창을 극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는 먼저 3부작의 비극 형식을 도입했는데 각 부는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포박된 프로데테우스> 와 3부작 <오레스테이아>이다. 


<포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간결하면서도 힘찬 비극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빌려왔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비극을 통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류의 의지라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제를 확립했다. 


위대한 3부작 <오레스테이아>는 그가 죽기 2년 전, 즉 서기전 458년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집은 다양한 예술적 기교를 내포한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삼았다. 

또 모권제에 대한 부권제의 승리를 묘사하여 아테네의 민주 정치를 긍정하고 법치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대를 이어 전해지는 오만하고 포악한 복수로 결국에는 누구도 응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주제이다. 

이 작품은 세계 희극 사상 가장 우수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정치적으로 민주파를 옹호했으므로 그의 비극 곳곳에서 민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도 모순은 있어 때로는 귀족의 시선으로 당시의 현실을 보기도 했다. 

정치적인 모순은 종교적인 면에도 반영되었는데 그는 신의 공정함을 찬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을 적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이스킬로스의 사상적 모순은 아테네 조기 민주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의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묘비에 희극과 관련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얻은 체험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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