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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독일의 '철의 재상'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비스마르크
입니다 :)

 

비스마르크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비스마르크, '철의 재상'

 

생몰년: 1815~1898년
국  적: 독일 
출생지: 프로이센의 쇤하우젠
성 격 : 냉혹하며 의지력이 강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귀족 가문 출신, 아버지는 정부의 관원이었음

비스마르크는 천성적으로 총명하여 학업성적 또한 우수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난폭한 성격으로 늘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는 1832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갔고 1년 반 뒤에는 베를린 대학으로 전입해 법률을 전공했다. 그는 역사와 외국어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대학 시절의 그는 친구들과 28차례나 싸운 기록이 있다. 1835년 비스마르크는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 법원에서 견습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근본적으로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늘 업무 시간에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가고는 했다. 비스마르크는 1847년에 결혼했는데 부인은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점차 과거의 악습을 버리고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

 

결혼한 얼마 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연방의회의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차츰 정치 신념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가장 좋은 정부 형식은 전제군주정만한 것이 없으며, 독일 연방은 반드시 프로이센이 통일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59년, 비스마르크는 주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었고 1861년에는 주 프랑스 공사를 맡았다. 1862년, 그는 프로이센 수상 및 외교 대신이 되었다. 며칠 후,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유명한 '철혈정책'을 제시했다.

 

즉, '재의 중대한 문제는 공허한 빈말이나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철과 피로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은 이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그는 무력이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정치적 문제란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독일 연방의 통일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세 차례의 왕조 전쟁으로 통일 독일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첫 번째는 1864년 프로이센과 덴마크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덴마크에 속해 있던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의 두 공국(주민은 대부분 독일 연방 사람이었다)을 독일로 편입시켰다. 두번째는 1866년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몰아내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북부 독일 연방을 세우며 독일 연방의 북부와 중부를 통일했다. 세 번째는 1870년 프로이센 대 프랑스 전쟁(보블전쟁이라고도 한다)이었다. 이 전쟁으로 남부 통일을 저해하던 요소를 없애고 독일은 유럽에서 우뚝 일어서게 되었다. 강대국 프랑스는 스당전투에서 맥없이 무너졌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혔으며 파리는 프로이센군이 점령했다. 1871년 1월 18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통일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프로이센국왕은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수상이 되어 공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19세기 하반기 유럽정치 무대의 풍운아로 등장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한 후 안으로는 경제 발전에, 밖으로는 유리한 국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또한 해외 진출을 꾀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1858년,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야심만만하고 외고집인 사람이었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정책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하는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1890년 3월,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비스마르크는 28년 만에 정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1898년 3월 18일 비스마르크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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