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미켈란젤로
입니다 :)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생몰년 : 1475~1564년 
국 적 : 이탈리아 
출생지 : 피렌체의 카프레세 
성 격 : 성실하며 자유를 숭배함 
신 분 : 화가, 조각가, 기술자 
가 정 : 아버지는 카프레세의 행정장관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쇠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그는 태어난 후 줄곧 유모의 집에서 자랐다. 유모의 남편이 석수였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많은 조각들을 접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열네 살 때 피레네의 은행가인 '무관의 제왕' 로렌조 데 메디치의 '메디치 동산' 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엄격한 기술적인 훈련과 선진적인 르네상스 의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이후 그의 예술 창작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창작 생애를 시작했다.

 

초기 조각 작품인 《피에타》는 그의 예술적 조예가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죽은 예수는 성모의 무릎에 안겨있고 성모는 사랑과 근심 어린 시선으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비탄에 잠기게 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피에타》가 전시된 후 로마 전역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아직 스물다섯살도 안 된 젊은이의 작품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 성모의 어깨에 '작가-미켈란젤로' 라고 새겨 넣었는데 이것으로 《피에타》는 유일하게 그의 낙관이 새겨진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으로는 《다비드》, 《모세》, 《죽어가는 노예》 등이 있다. 《다비드》는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조각으로 고대 이스라엘 다윗왕의 정의감에 불타는 전사의 위용과 힘을 표현했다. 그는 이 조각을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완벽에 가까운 경지에 다다른 이 조각은 그를 '가장 위대한 조각가' 로 만들어 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에서도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가 시스틴 성당에 그린 벽화 《천지창조》는 4년 5개월에 걸쳐 제작되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이탈리아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심지어는 다빈치도 이 작품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느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걸출한 작품을 배출해 낸 예술가일 뿐 아니라 일생토록 전장에서 분투한 애국 용사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피렌체 사람들과 함께 외국의 침략자들과 교황의 군대에 맞서 전투를 벌이던 중 성의 수비공사 총지휘를 맡았다. 성이 함락되어 적의 감옥에 갇힐 때까지 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고수했다. 

1564년 2월, 미켈란젤로는 향년 89세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그는 일생의 마지막 20년 동안 건축 사업에 온 열정을 쏟아 산피에트로 성당을 설계하고 건축 공정을 감독했다. 미켈란젤로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예술에 힘써 자유분방하고 호기심 가득하며 웅대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응형
반응형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지동설의 창시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코페르니쿠스
입니다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창시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창시자

 

생몰년 : 1473~1543년 
국  적 : 폴란드 
출생지 : 비수아 강 근처 토룬 
성 격 : 성실하며 의지가 굳음 
신 분 : 천문학자 
가 정 : 상인 가문 출신, 아버지는 토룬시의 시장 

코페르니쿠스는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삼촌 바체르로데 대주교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열여덟 살에 크라코프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의 인문주의자와 수학자, 그리고 천문학자 볼제프스키 등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는 항상 이들 학자에게 천문학이나 수학과 관련된 질문을 많이 했고 천문관측 장비들을 이용해 천문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바체르로데 대주교는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 교회법을 공부하게 했다. 1497~1500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며 교회법 이외에도 각종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학교의 천문학교수이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도자인 라파엘로와 밀접하게 왕래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라파엘로와 함께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며 데이터를 기록하거나 선지자들의 천문학 관련 저서를 탐독했다.

그는 일찍이 서기전 3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말했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개념을 이해했다. 그는 지구에서 태양과 달에 도달하는 각 거리의 근사치를 측정했으나 뒤에 종교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저작들을 읽으며 그리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실제 천문 측량과 선인의 저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천동설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천동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것으로, 2세기 로마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이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해냄으로써 더욱 체계화되었다. 천동설은 지구는 유한한 우주의 가운데에 정지해 있고 해, 달과 다른 별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돈다는 개념이다. 이 학설은 기독교에서 진리로 신봉되면서 신권 통치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1506년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로 돌아와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신부로 재직했다. 이는 그에게 사회적인 지위와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계속해서 천문학 연구와 과학실험에 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연구의 편리를 위해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성루를 거처 겸 작업실로 이용했다. 그는 그곳에 작은 천문대를 만들고 자신이 제작한 초라한 도구들로 장장 30년에 걸친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거작《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썼는데, 관측사례 27개중 25개는 성루에서 관측 기록한 것이었다. 이 저서는 총 6권으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가 정지되어 있다는 이론을 비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천체의 운행 현상에 대해 기술하고 오래도록 진리로 믿어져 왔던 천동설을 뒤엎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일체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설은 우주의 중심과 우주 유한론에 대한 관점을 견지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천문학을 신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한 천문학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근대 과학 발전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일흔 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반응형
반응형

마키아벨리, Machiavelli, 정치학의 아버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마키아벨리
입니다 :)

마키아벨리, 정치학의 아버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마키아벨리, 정치학의 아버지

 

생몰년 : 1469~1527년  
국    적 : 이탈리아  
출생지 : 피렌체 
성    격 : 예민하고 급진적이며 자유를 숭상함 
신    분 : 정치가, 문학가, 군사가 
가    정 : 몰락한 귀족 가문 

마키아벨리의 집안은 피렌체의 명문 귀족이었다. 
일찍이 13세기에 가문의 숱한 인물들이 정치적 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마키아벨리의 집은 그중에서 빈한한 축에 속했다. 
그의 부친은 공직에 있었으나 빚을 상환하지 못해 면직되고 말았다.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마키아벨리는 어렸을 때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과 가정 분위기 속에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으로 유년기부터 이미 재능과 식견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는 성장한 이후 정치에 투신했는데 스물아홉에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행정 기관인 자유 평화 10인 위원회'의 부서기관장이 되었다. 
외교와 군사 및 정부 문건의 초고를 쓰며 여러 차례 이탈리아 각지와 독일, 프랑스 등지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1501년 마키아벨리는 마리에타 코로시니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512년 공화국이 전복되고 군주가 복위하자 체포돼 감금되었다. 
그것으로 그의 정치생명은 끝이 나게 된다. 
다시 자유를 찾게 된 뒤로 그는 오래도록 고향에 숨어 지내며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무렵 그는 문장으로 이론을 세워 뛰어난 학술적 업적을 이루어 냈다. 

1512~1513년, 마키아벨리는 역사 서적인 동시에 정론서인《티투스 시대 초기의 10년에 관한 서설》을 완성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자신의 공화주의 사상을 명확히 밝혔으며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전투에 대해 분석하며 군사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가 편찬한 《피렌체사》는 후세에 이탈리아의 진귀한 역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은 간결 명확하면서도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이탈리아어 산문 형식으로 쓰였다. 

그가 지은 저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1513년에 완성된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탈리아의 수백 년간에 이르는 정치적 실천과 격렬한 혁명에 대에 총 결산했다.
이 책은 작가의 10여 년에 걸친 경험과 교훈의 이론적 결정체이다. 
그는 공화정만이 최고의 국가 통치 방식이기는 하지만 공화제로는 이탈리아의 사분오열된 국면을 해소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한한 권력을 가진 군주정만이 국민을 복종시키고 강한 적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권모술수, 잔학 행위, 사기, 위선, 배신 등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으며 단지 군주의 통치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사상을 후에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불렀다. 

《군주론》은 정치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군주론》은 바티칸에서 정한 첫 번째 정치 금서로 인류 사상사에서 무참히 비난받았던 한편 호평을 받은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출판되고 400여 년간 줄곧 정치가, 모략가, 야심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20세기 후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과학적인 태도로 이 책을 접하기 시작했다. 
유사 이래 정치 투쟁의 기법에 대한 가장 독보적이고 예리하며 성실한 '검시보고서'라고 보게 된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과 논리학을 최초로 분리한 정치 사상가라고 평가되고 있다. 

1527년, 피렌체에서 폭동이 발생해 군주 통치가 전복되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화국 신정부를 위해 여생을 바치며 일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좌절한 나머지 병을 얻어 얼마 후 절망감과 고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반응형

레오나르도 다빈치, Da Vinci, 문예 부흥의 거장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입니다 :)

 

다빈치, 문예부흥의 거장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문예 부흥의 거장

 

생몰년 : 1452~1519년  
국    적 : 이탈리아  
출생지 :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 
성    격 : 진지하며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했음 
신    분 : 화가, 조각가,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 
가    정 :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어머니 카테리나는 농부의 딸이었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문예 부흥 시기 최고의 화가로 전 유럽 문예 부흥 시기에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박학하고 다재다능했으며 심오한 사상으로 예술의 대가 혹은 과학의 거장으로 불린다. 
또한 그는 문예 이론가였으며 철학자, 시인, 음악가, 기술자와 발명가이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그를 '문예 부흥 시기의 가장 완벽한 대표'. '최고의 학자', '필적할 자가 없는' 천재 등으로 표현했다.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의 손에서 다섯 살까지 자랐으며, 그 후에는 할아버지 집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다빈치는 총명했으며 부지런하여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다양한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다빈치는 국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종종 이웃들에게 그림을 그려주었으며 '회화의 신동'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다빈치는 열네 살에 피렌체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유명한 예술가 베오키오를 스승으로 모시며 체계적으로 조형예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빈치는 그곳에서 지명도 높은 숱한 인문주의자와 예술가, 과학자들을 사귀면서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스무살 때에는 이미 예술에 조예가 깊어져 모두가 인정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가 그린 벽화 《최후의 만찬》, 제단화 《암굴의 성모》와 초상화 《모나리자》는 세계 예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며 유럽 예술의 최고봉이다. 

철학자로서의 다빈치는 지식은 반드시 실천에서 출발해야 하며 실천을 통해서 과학의 오묘함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뒤에 갈릴레오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 철학자 베이컨의 이론적인 보완을 통해 완성되어 근대 자연 과학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다빈치는 천문학 영역에서는 전통적인 '천동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심지어 태양에너지를 이용할 생각도 했었다. 
물리학 방면에서는 액체의 압력에 대한 개념을 발견했으며 연통관의 원리를 도출해냈다. 
또 관성의 법칙을 발견하고 지렛대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또한 원자 원리를 예지하여 원자력의 위력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해부학과 생리학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겨 근대 생리해부학의 시조라고 여겨진다. 
그의 연구와 발명은 군사와 기계, 수학 영역과 수리공정 등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공헌을 했다. 
이렇듯 다빈치의 연구는 자연 과학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발전과 성과를 거두었다. 

다빈치는 만년에 유랑을 하며 지냈는데 1517년 예순다섯 살에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 
1519년 5월 2일, '문예부흥의 거장' 이자 '인류 지혜의 상징'인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반응형

콜럼버스, Columbus,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콜럼버스
입니다 :)

콜럼버스,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콜럼버스,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

 

생몰년 : 1451~1506년 
국    적 : 이탈리아 
출생지 : 이탈리아 제노바 
성    격 : 의지가 굳고 모험심이 강함 
신    분 : 항해가 
가    정 : 양모 방직의 가내 수공업에 종사 

콜럼버스는 1451년 8월 25일에서 10월 말 사이에 태어났다. 
그에게는 남동생 세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두 남동생은 요절했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중세 수공업 가정으로 일할 수 있는 가족 성원은 모두 노동에 종사했다. 

콜럼버스는 어려서부터 항해 모험을 좋아해서 열다섯 살 때 화물선을 타고 지중해를 항해하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동방견문록)》에서 묘사된 많은 인구와 풍부한 물자의 동양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콜럼버스는 젊어서 당시 유행하던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을 받아들였다. 
유럽에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가면 전설 속의 황금과 은, 향료로 가득한 중국과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재화와 보물을 얻는 것이 그의 일생의 꿈이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콜럼버스는 자신만의 항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세 시대 유럽에는 원양 항해에 대한 지식과 조건이 부족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모험 계획은 포르투갈 국왕으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그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함선 세 척을 거느리고 스페인의 팔로스항을 떠났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서양 횡단이라는 위대한 항해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탐험대원은 총 87명이었다(일설에는 90명이라고도 한다). 
함대는 대서양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역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항해해 나갔다. 
함대가 30여 일 후 미국의 바하마 군도에 이르렀을 때 콜럼버스는 자신이 드디어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발견한 열도를 '서인도 군도' 라 이름 짓고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12월 25일 성탄전 당일, 기함(함대 사령관이 타고 있는 군함) 산타마리아호는 히스파니올라(서인도제도 중부 대앤칠리스 제도에 있는 섬, 아이티 섬) 북안에서 좌초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그는 자원자 39명을 섬에 남겨 라나비닷에 정착하게 하고 남은 사람들을 두 척의 배에 태워 귀국했다. 

1493년 3월 15일, '대서양 해군 원수' 콜럼버스는 240일의 원양 항해 모험 후 팔로스항에 도착했다. 
이 소식은 스페인과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개선하는 함대의 모습은 자못 위풍당당하여 알몸에 문신을 한 인디언 10명을 행렬의 맨 앞에 세웠다. 
또한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은보화와 진기한 새, 짐승들을 과시하며 콜럼버스는 행렬의 마지막에 말을 타고 등장했다. 
왕실에서는 그를 최상의 귀빈으로 대접했다. 
여왕은 여러 차례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새로운 해군 원수의 전포(옛날 전사들이 입던 옷)를 내렸다. 
콜럼버스의 탐험 경과를 듣고 난 후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찬양의 시를 읊었다. 
1493년 5월 29일, 스페인 국왕은 콜럼버스에게 새로 발견한 군도와 육지의 해군 제독, 국왕 대리, 총독의 직함을 수여한다고 반포하고 수여 증서를 발급해주었다. 

이후에 콜럼버스는 다시 1493년, 1498년, 1502년 세 차례에 걸쳐 항해를 떠났는데 그 중 두 번째 항해의 규모가 가장 컸다. 
그러나 이 세 번의 항해에서 그는 인도나 중국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신대륙에 대한 탐험 범위를 넓힐 수 있었을 뿐이었다. 
네 차례에 걸친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콜럼버스는 병이 깊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결국 1506년 발라돌리드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콜럼버스는 죽기 전까지도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뒤에 아메리고라는 이탈리아인이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원래 아무도 모르던 신대륙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신대륙을 자신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따온 '아메리카'로 부르게 되었다.

반응형
반응형

메흐메트 2세, Mehmet II,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정복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메흐메트 2세
입니다 :)

메흐메트 2세,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정복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메흐메트 2세,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정복자

 

생몰년 : 약 1430~1481년 
국    적 : 터키 
출생지 : 에디르네  
성    격 : 냉혹하고 호전적이며 호기심이 많음 
신    분 : 정치가, 군사가  
가    정 : 부친은 술탄 무라드 2세 

메흐메트(매머드 2세라고도 함)는 어려서 궁내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좀 자란 뒤에는 오스만의 관례에 따라 소아시아 서부의 마니사로 보내져 그곳을 관리했다. 
1444년 그의 부친 술탄 무라드가 정사에 염증을 느끼고 물러나니 12세였던 마흐메트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흐메트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는 외세의 침입에 놓이게 되었고 대신들은 정권 다툼에 열을 올리는 등 혼란한 국면에 처했다. 
그러나 어린 흐메트는 이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늙은 술탄 무라드가 할 수 없이 복위하게 되었다. 
1446년 그는 다시 마니사로 보내져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문학과 역사를 공부했고 특히 전략전술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1451년, 술탄 무라드가 병사하자 흐메트는 속히 수도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하던 날, 그는 명령을 내려 아직 젖먹이인 동생을 죽여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처음 왕위에 올라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1453년 4월, 친히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며 육로와 해로로 공격해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의 수비군은 만 명도 안 되었지만 견고한 방어 진지 덕분에 적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그러자 흐메트의 군대는 수없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동요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긴박한 순간에 흐메트는 사병들에게 성을 함락시키면 사흘간 사병들이 재물을 약탈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이며, 일체의 재물과 노예는 승리자의 몫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오스만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고 비잔틴 황제는 전사했다. 
입성한 다음날 흐메트는 철군을 요구하던 주요 대신들을 잡아서 처형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은 천년을 이어온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후에 이스탄불로 개명되어 오스만 제국의 정치 행정 중심도시가 되었다. 
흐메트는 정복지의 통치에 대해 자제와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는 제국의 행정과 무슬림 신민에 반하지만 않는다면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방식과 법률로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민족 학교를 세워 자신의 민족 언어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종교적인 차별과 박해하는 정책을 취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정복자 흐메트는 명성에 걸맞게 31년의 재위 기간 동안 거의 해마다 정복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통치 만년에 이미 소아시아의 20개 도시와 유럽의 28개 도시를 세운 대제국이 되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두 대륙과(발칸과 아나톨리아) 두 대양(에게해와 흑해)의 군주' 라 불렀다. 
1481년 5월 초, 흐메트는 자신의 큰 아들 바야 지트에게 독살당했는데 그의 나이 채 5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반응형
반응형

구텐베르크, Gutenberg, 유럽 활자 인쇄술의 발명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구텐베르크
입니다 :)

 

구텐베르크, 유럽 활자 인쇄술의 발명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구텐베르크, 유럽 활자 인쇄술의 발명자

 

생몰년 : 1398~1468 
국  적 : 독일 
출생지 : 독일의 마인츠 
성  격 : 의지가 굳고 총명함 
신  분 : 발명가 
가  정 :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음. 구텐베르크는 어머니의 성을 이름으로 한 것임 

마인츠라는 고대 독일의 한 작은 왕국에 라인강이 유유히 돌아 흐르고 있었다. 
500여 년 전, 그곳에서 유럽의 활자 인쇄술이 탄생했다. 
발명가는 요한 구텐베르크로 일생의 전반 40년을 마인츠에서 보냈다. 
당시 그는 조폐국에서 주화를 찍어내면서 부형(patrix)으로 주화의 모형 (matrix)을 찍어내는 작업에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448년을 전후로 그는 마인츠의 공민 자격을 얻었다. 

1450년, 그는 부유한 금은 세공사 푸스트와 계약을 체결하고 인쇄공장을 800 길드의 전세금에 빌리기로 했다. 
이후 활자와 인쇄기를 제작하고 완성하기까지 전세금이 1,600 길드로 올랐다. 
1455년 푸스트는 구텐베르크에게 배상을 요구했고 그는 패소하여 자신의 인쇄공장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뒤에 그는 전에 인쇄 공장에서 활자를 배열하던 C. 후메리라는 사람과 합작해 1456년 대출을 받아 다른 인쇄기를 만들었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발명한 활자, 잉크, 인쇄기로 《성경》을 인쇄해 내며 유럽에 활자 인쇄 기술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성경》은 총 3권이며 각 페이지가 42행으로 이루어져 《42행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이 바로그 유명한 《구텐베르크 성경》으로 유럽 최초의 활자 인쇄술로 제작된 판본 도서이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유럽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 책이라는 것은 대부분 수도사들이 직접 필사한 것으로 수량이 극히 적어 매우 값 비쌌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책'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으며 이것은 문명의 발전과 전파를 저해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으로 유럽에서는 서적이 대량으로 인쇄되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부흥의 조류에 부응해 유럽을 중세의 우매함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1462년, 마인츠 지역은 나소의 아돌프 부대의 약탈로 무너지고 구텐베르크 인쇄 공장의 인쇄공들은 각지로 달아나 버렸다. 
그들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술을 노르만 각지로 전파했다. 
구텐베르크는 만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았으며 14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기록에 의하면 1234년의 상정고금예문 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 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물론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700~741년 무렵에 제작된 《무구정광 다라니경》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반응형
반응형

제임스 와트, Watt, 증기기관의 발명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제임스 와트
입니다 :)

 

제임스 와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제임스 와트, Watt, 증기기관의 발명가

 

생몰년 : 1736~1819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스코틀랜드의 클라이드(그린녹) 
성 격 : 침착하며 겸손함, 고집스러움 
신 분 : 과학자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아버지는 조선 사업에 종사했고 어머니는 와트의 계몽 선생님이었음

 
제임스 와트는 어려서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아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었을 때도 부모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와트의 어머니는 그에게 문법과 수학을 가르치며 각종 장난감과 기계를 가지고 놀게 했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문제를 관찰하고 사고하며 실천하는 응용력을 기를 수 있었다.

 

뒤에 와트는 글래스고 그래머스쿨에 들어갔으나 건강으로 인해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어야 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와트는 글래스고에서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후에 그는 런던으로 가서 기계 제조에 대해 공부했다. 1757년, 와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글래스고 대학에서 수학 기계공이 되었다. 이것은 와트에게 학습과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화학자 조지프 블랙과 후에 물리학 교수가 된 존 로빈슨 등과 친분을 맺었다. 세 사람은 늘 함께 모여서 증기기관의 개량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했다. 와트는 그렇게 해서 많은 과학적 이론과 지식들을 익힐 수 있었다.


1764년, 와트는 사촌 누이인 마가렛 밀러와 결혼했다. 같은 해, 와트는 뉴커먼 배수기관을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기계는 금방 고칠 수 있었지만 와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기계를 개량하고 싶었던 것이다. 와트는 뉴커먼 배수기관이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료 소모가 지나치게 크고 활용 범위가 작아 갱도의 물을 뽑아 올리거나 관개에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와트는 이것을 더 좋은 증기 기관으로 개량하기 결심했다. 그는 존 바로크라는 공장주와 합작해 2년간 반복 실험한 결과 1768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증기 기관을 만들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발명 특허권을 획득했다. 와트가 발명한 새 증기 기관은 분리식 컨덴서 등 발전된 기술을 도입하여 연로 소비량을 뉴커먼 기관의 1/4로 줄였다. 이런 중요한 기술적 진전으로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1781년, 와트는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꿔주는 다섯 가지 방법을 개발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유성기어장치'는 이후 공업 생산에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1782년, 와트는 '복동(순환식)기관' 으로 특허를 취득했고 1784년에는 또다시 새로운 특허를 내면서 '수평(평행) 운동'을 개발했다. 이로써 와트기관은 더욱 널리 쓰이게 되었다. 1788년, 그는 다시 원심조속(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개량)를 발명했고 1790년에는 압력계를 발명했다. 와트는 이러한 장치들을 이용해 실제적인 와트기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와트기관의 발명은 제1차 산업혁명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와트기관의 광범위한 활용으로 인류는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통제가 가능한 동력 자원을 얻게 되었다. 또한 와트 기관의 광범위한 활용은 경제의 비약적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07년, 미국인 풀턴은 와트기관을 선박에 장착해 범선의 시대에 종결을 고했다. 1814년, 영국인 트레비식은 와트기관을 열차에 장착해 육로 운송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785년 와트는 런던 왕실 학회 회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806년에는 글래스고대학의 법학 박사를 받게 되었다. 1814년 그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1819년 8월 25일, 와트는 85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후에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발명을 기념하기 위해 출력의 단위를 '와트'라 이름 지었다.

반응형
반응형

조지 워싱턴, Warshington, 미국 건국의 아버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조지 워싱턴
입니다 :)

 

조지 워싱턴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조지 워싱턴, Warshington, 미국 건국의 아버지

 

생몰년 : 1732~1799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버지니아 주
성 격 : 인내심이 강하고 민주적
신 분 : 정치가, 군사가
가정 : 귀족 출신, 아버지는 장원의 영주였음


조지 워싱턴은 명문 귀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예절 교육을 받으며 도덕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1752년, 형 로렌스가 죽고 워싱턴은 8,00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농노 수백 명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 그는 영국의 버지니아 총독 로버트 딘위디의 명으로 프랑스군에 영국이 에팔레치아 산맥 서쪽에 보유하고 있는 영토의 '잠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그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스물세 살에 이미 변경의 안전과 버지니아를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1759년 1월, 워싱턴은 부유한 과부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했다.


1773년, 유명한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하며 영어과 북미 대륙간의 충돌이 격렬해졌다. 워싱턴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고서는 북미의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1774년 9월 5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렀다. 워싱턴은 팔라멜피아의회 대표로 군장을 하고 외의에 출석했다. 이 대회에서 워싱턴은 무장투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자는 결의를 독촉해 회의에서 채택되게 했다. 당시의 북미 대륙은 해군이 없었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육군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을 상대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무척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1775년 4월 18일, 렉싱턴의 총성을 시작으로 미국의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제2차 대륙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고 워싱턴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결정되었다.


독립군이 초기에 승리를 거두었기는 했지만 미국군에 비하면 적이 훨씬 강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독립군은 뉴욕 수비전에서 거의 전군이 몰사할 뻔했다. 1776년 겨울, 독립군이 매우 힘든 상황에 놓이자 워싱턴은 모험을 택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트렌턴에서 프로이센 용병을 기습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워싱턴은 다섯 명의 사상자(2명 사망, 3명 부상)를 냈을 뿐 적 천여 명을 무찔러 군의 사기를 올려놓았다. (델라웨어 전투) 1777년 가을, 세러토가 전투가 시작되었다. 허드슨 강변 서안의 고지에서 영국의 명장 존 버고인 장군과 8,000여 명의 군대는 독립군으로부터 양측면을 공격당해 투항했다. 이 전투는 1778년 2월 미불 동맹을 촉진시켰고 미국은 점차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781년 10월 9일 미국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워싱턴은 어떤 상도 거절한 채 부대를 떠나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갔다. 1787년, 워싱턴은 다시 정계에 몸을 담아 제헌회의를 열고 현재까지 이어오는 헌법을 만들었다. 1789년,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두 차례의 임기를 마친 후(1789~1797년), 워싱턴은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갔다.


1799년, 워싱턴은 67세에 후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반응형

예카트리나 2세, Ekaterina II, 제정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여왕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예카트리나 2세
입니다 :)

 

예카트리나 2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예카트리나 2세, 제정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여왕

 

생몰년 : 1729~1796년
국 적 : 러시아
출생지 : 프로이센 슈테틴
성 격 : 냉혹하고 야심만만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귀족 가문 출신


예카트리나의 원래 이름은 소피아 프리드리카 아우구스타로 독일 왕실의 후예였다. 열다섯 살에 모친과 함께 러시아로 와서 이름을 예카트리나 알렉세에브라로 바꾸고 이듬해 표트르 3세와 결혼했다.


1762년, 예카트리나는 정변을 일으켜 겨우 반년 동안 제위에 있던 남편 표트르 3세를 가두었다. 그녀는 3일 후 남편을 죽이고 러시아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예카트리나 2세가 즉위하면서 국내 형세는 매우 불안해졌다.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녀는 귀족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농노제를 공고히 하는 등의 조치로 자신의 정권 기반을 다져나갔다. 동시에 그녀는 중앙과 지방의 정부기관을 개혁했다. 고도로 집중된 전제정치 제도를 세우며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상공업의 발전을 꾀했다. 그로써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1세 이후 처음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갔고 전성시기로 진입했다. 그녀는 탁월한 재능과 업적으로 표트르 대제 이후 두 번째로 귀족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예카트리나 2세는 의심할 여지없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야심에 찬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통치 기간 동안 전쟁을 6차례나 일으키며(세 번은 대 폴란드전, 두 번은 대 투르크전, 한 번은 대 스위스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폴란드를 나누어 가졌다. 

 

이것은 이 독일 공주가 러시아를 위해 크림반도와 폴란드에서 승리를 거두며 흑해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63만 평방킬로미터였던 영토를 1642만 평방킬로미터나 늘려 총 1705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카트리나 2세는 매우 잔인한 차르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세운 업적은 러시아 농민과 농노들의 생활을 한층 괴롭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녀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봉기인 푸가초프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박해하고 약소민족과 국가를 정복해 잔혹한 면을 드러냈다.

 

예카트리나 2세는 만년에도 세계의 패권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6개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베를린, 비엔나, 콘스탄티노플, 아스트라칸)를 포함하는 러시아 제국을 건설하고자 이란과 중국, 인도를 공격했다. 1796년 11월 6일, 그녀는 67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반응형

칸트, Kant, 근세 철학의 집대성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칸트
입니다 :)

 

칸트, 근세 철학의 집대성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칸트, 근세 철학의 집대성자

 

생몰년 : 1724~1804년  
국 적 : 독일  
출생지 : 독일 동프로시아 쾨니히스베르그  
성 격 : 낙관적이고 성실하며 소박함  
신 분 : 철학자, 자연 과학자  
가 정 : 수공업자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말안장 만드는 사람이었음.  

칸트는 몸이 약해서 평생 동안 고향을 거의 떠나보지 못했다. 여덟 살에 담임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입학했다. 이 교는 인문주의 교육을 표방하고 교회가 개인의 사상을 경직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이런 사상은 어린 칸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40년, 열여섯 살의 칸트는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며 스승 크누첸의 가르침을 받았다. 크누첸은 칸트에게 철학 사상을 가르쳤고 자연과학, 특히 뉴턴의 과학 사상을 공부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745년, 대학을 졸업 칸트는 7년간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는 1755년에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무급강사 자격을 얻었다. 칸트는 15년 동안 학생들의 수업료로 생활비를 조달했다. 그때부터 칸트는 숱한 중요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칸트의 학술 생애는 1770년을 기준으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에는 주로 자연 과학을 연구했고 후기에는 철학을 연구했다.  그는 1755년에 발표한 《자연통사와 천체이론》과 《우주발전사 개론》에서 태양계 기원의 성운설을 제기했다. 이 가설에서 성운은 크고 작은 고체 미립자로 이루어지며 '천체는 인력이 가장 강한 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고 보았다. 인력은 미립자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만들며 큰 미립자는 작은 미립자를 끌어당겨 더 큰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 덩어리는 점점 더 커지며 인력이 가장 강한 중심부는 흡인력이 더 커져 많은 미립자를 빨아들이면서 이것이 먼저 태양을 형성한다. 외부의 미립자 운동은 태양의 흡인 아래 중심체로 떨어지는것 이 다른 미립자와 부딪히면 방향을 바꾼다. 이것이 태양의 주위를 돌며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태양을 도는 미립자들은 점차로 몇 개의 흡인 중심을 형성하고 결국 태양을 도는 행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의 가설은 뉴턴의 유물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천체의 발전을 일종의 규칙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후기인 1781년부터 9년 동안,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1781년),《실천이성 비판(1788년)과 《판단력 비판》(1790년) 등을 포함해 다양 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저서들을 내놓았다. '3대 비판'의 출판은  칸트 철학 체계의 완성을 의미한다. 칸트는 완전한 철학 이론을  세우고 철학 분야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이루어 냈다. 그 는 인지의 이원론과 삼단론을 제기하면서 인과율, 종교문제와 논리학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칸트는 피히테, G.W.F 헤겔 철학 사상의 선구자가 되었다.

 

1770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의 논리와 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786년에는  동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그 외에도 그는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이탈리아 토스카니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향년 8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도시 사람들이 그의  운구를 따르며 그 도시가 낳은 위대한 아들과 이별을 고했다.

반응형
반응형

아담 스미스, Adam Smith, 현대 경제학 이론의 아버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담 스미스
입니다 :)

 

아담 스미스, 현대 경제학 이론의 아버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담 스미스, 현대 경제학 이론의 아버지

 

생몰년: 1723~1790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스코틀랜드의 커콜디
성 격 : 영리하고 신중하여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줌.
신 분 : 경제학자, 철학자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아버지는 해관 직원이었음


아담 스미스는 네 살 때 거리에서 노래하던 여인에게 납치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숲까지 쫓아간 어머니 덕에 구출되었다고 한다. 열네 살에 글레스고대학 입시에 통과해 수학과 자연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성적이 우수해서 1740년에는 무료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고 계속해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당시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홈을 알게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746년, 아담 스미스는 졸업을 했지만 일을 구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1751년, 아담 스미스는 글레스고 대학의 교수직을 맡게 되어 논리학과 도덕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경제사상은 이 시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1759년, 그는《도덕 감정론》에서 도덕적인 판단의 원인을 증명하거나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락되는지를 결정하는 원인을 설명했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을 이기적인 동물로 간주했으나 그들은 이기적인 사고에 기인하여 도덕을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 책으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1764년, 스미스는 글레스고 대학 교수직을 사직하고 청년 귀족인 바클루 공작의 개인 교사를 맡았다. 그는 바클루 공작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면서 프랑스 계몽학파의 사상가인 볼테르와 중농학파의 영수인 케네 등 많은 유명한 학자들을 사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아담 스미스의 대표작 《국부론》의 체계가 서서히 잡혔다.


1767년, 아담 스미스는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에 매진했다. 그리고 1776년에 당시 경제학의 원조가 된 《국부론》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출발해 경제 성장의 원천과 동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자유 경제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스미스는 바로 이 책에서 그의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했다.

 

이 저서는 총 5편으로 이루어지는데 제1편은 분업의 발전을 국민의 부의 증식에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다. 제2편은 자본의 성질, 구조, 축적 및 사용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앞의 두 편은 아담 스미스 경제학 원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뒤의 세 편은 국민의 부의 증가와 관련한 간접적인 요소를 고찰하고 있다. 그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출발해 각기 다른 경제 정책과 경제 학설 그리고 제정 제도가 국민의 부를 증가시키는 것의 관계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국부론의 출판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전 유럽대륙으로 퍼져나갔다.

 

1778년,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해관의 세무국장을 역임했다. 1787년에는 모교인 글레스고 대학의 학장직을 맡았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1790년 67세로 삶을 마감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