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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지동설의 창시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코페르니쿠스
입니다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창시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창시자

 

생몰년 : 1473~1543년 
국  적 : 폴란드 
출생지 : 비수아 강 근처 토룬 
성 격 : 성실하며 의지가 굳음 
신 분 : 천문학자 
가 정 : 상인 가문 출신, 아버지는 토룬시의 시장 

코페르니쿠스는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삼촌 바체르로데 대주교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열여덟 살에 크라코프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의 인문주의자와 수학자, 그리고 천문학자 볼제프스키 등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는 항상 이들 학자에게 천문학이나 수학과 관련된 질문을 많이 했고 천문관측 장비들을 이용해 천문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바체르로데 대주교는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 교회법을 공부하게 했다. 1497~1500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며 교회법 이외에도 각종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학교의 천문학교수이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도자인 라파엘로와 밀접하게 왕래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라파엘로와 함께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며 데이터를 기록하거나 선지자들의 천문학 관련 저서를 탐독했다.

그는 일찍이 서기전 3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말했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개념을 이해했다. 그는 지구에서 태양과 달에 도달하는 각 거리의 근사치를 측정했으나 뒤에 종교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저작들을 읽으며 그리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실제 천문 측량과 선인의 저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천동설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천동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것으로, 2세기 로마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이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해냄으로써 더욱 체계화되었다. 천동설은 지구는 유한한 우주의 가운데에 정지해 있고 해, 달과 다른 별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돈다는 개념이다. 이 학설은 기독교에서 진리로 신봉되면서 신권 통치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1506년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로 돌아와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신부로 재직했다. 이는 그에게 사회적인 지위와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계속해서 천문학 연구와 과학실험에 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연구의 편리를 위해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성루를 거처 겸 작업실로 이용했다. 그는 그곳에 작은 천문대를 만들고 자신이 제작한 초라한 도구들로 장장 30년에 걸친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거작《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썼는데, 관측사례 27개중 25개는 성루에서 관측 기록한 것이었다. 이 저서는 총 6권으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가 정지되어 있다는 이론을 비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천체의 운행 현상에 대해 기술하고 오래도록 진리로 믿어져 왔던 천동설을 뒤엎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일체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학설은 우주의 중심과 우주 유한론에 대한 관점을 견지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천문학을 신학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한 천문학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근대 과학 발전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일흔 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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