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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Voltaire, 프랑스 계몽 운동의 선구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볼테르
입니다 :)

 

볼테르, 프랑스 계몽운동의 선구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볼테르, 프랑스 계몽 운동의 선구자

 

생몰년 : 1694~1778년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파리
성격 : 예지롭고 민감하며 자유를 숭상함
신 분 : 작가, 철학자, 계몽사상가
가 정 :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법원 공증인이었음

볼테르는 천성이 영리해 세 살 때 프랑스 시인 라퐁텐의 우화시》를 암송할 정도였다. 그는 열 살에 중학교에 입학했고 열두 살에는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볼테르는 종교에 반대하는 책이나 자유 숭상과 관련된 책 읽기를 좋아했다. 볼테르가 열여섯 살에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그가 계속해서 법률을 공부하기 원했다. 그러나 그는 문학을 좋아하고 종종 시를 지으며 세도가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


1717년, 젊은 볼테르는 프랑스 궁정의 문란한 활을 풍자하는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1년을 보냈다. 그는 옥중에서 비극 《오이디푸를 완성했으며 출옥한 후 파리에서 상연해 호평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725년, 볼테르는 영국으로 이주해 철학자 로크와 과학자 뉴턴의 작품을 연구했다. 1734년, 그 《영국서신》(또는 철학 서신이라고도 한다)을 발표했다. 이 책은 영국의 정치, 철학, 과학과 종교 등을 서간체 형식으로 쓴 것이다. 전제 군주제도와 프랑스 교파 간의 투쟁을 비난하며 유물론의 사상을 전해 프랑스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법원은 이 책을 금서로 정하고 전부 태워버리도록 했으며 볼테르를 로렌 부근의 작은 성루 에서 은거하도록 했다.

 

볼테르는 그곳에서 은거하며 지내는 동안 익명으로 《형이상학, 《뉴턴 철학의 요소들 등의 저서를 발표하며 여전히 봉건제도와 교회의 통치에 대해 맹렬히 공격했다. 1745년, 볼테르는 루이 15세에 의해 프랑스 역사를 편찬하는 사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어문 학원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는 권세가들을 거슬리게 하여 파리에서 다시 로렌의 성루로 쫓겨났다. 1750년, 그는 프러시아(프로이센) 국왕 프레드리히 2세의 청을 받고 귀빈 자격으로 프러시아로 갔다. 그러나 뒤에 사상의 관점에서 프레드리히 2세와 마찰을 일으켜 두 사람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볼테르는 두 번 다시는 어떤 군주와도 왕래하지 않았다. 1755년, 볼테르는 스위스 국경의 페르네에 성을 사들이고 그곳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볼테르는 페르네에 거주하면서 계몽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민주 사상을 전파하고 봉건 통치자들과 교회의 죄악을 규탄하면서 프랑스 사회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들을 평론했다.


당시 계몽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는 루소, 몽테스키외, 엘베시우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볼테르를 그들의 스승으로 모시며 숭배했다. 볼테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비극은 오이디푸스, 《브루투스, 《이렌느 등이고, 희극으로는 《방탕아》,《스코틀랜드 여인》이 있다. 그가 쓴 시로는 유명한 서사시인 《앙리 아드》와 풍자시 《오를레앙의 처네가 유명하다. 소설로는 자 디그》, 《낙천주의자, 캉디드》 등이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뛰어난 창의력과 재치 있는 언어 그리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기지 넘치는 풍자와 명구들을 숨겨두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세상을 떠나자 볼테르의 사상은 프랑스에서 폭넓게 찬미를 받았다. 1778년, 84세의 볼테르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의 극장에서 그의 새 작품인 《이레느》를 공연했을 때 배우들은 무대에 그의 대리석 반신상을 들고 나와서 대관 의식을 거행했다. 그 해 5월 30일 볼테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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