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뉴턴
입니다 :)

 

뉴턴, 과학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이작 뉴턴,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자

 

생몰년 : 1642-1727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링커셔의 울즈소프
성 격 : 부끄러움을 타며 말이 없고 사색을 즐겼음
신 분 : 과학자
가 정 : 농민 가정 출신. 뉴턴은 외할머니와 생활함

아이작 뉴턴은 어려서부터 말이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어서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뉴턴은 열두 살에 클라크의 약방에서 기숙하며 그란섬의 킹즈스쿨을 다녔다. 그는 나무 상자 유리병으로 물시계를 만들어 매일 새벽이면 시간에 맞춰 얼굴에 물을 떨어뜨리도록 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잠에서 깨어나 분초를 다투며 공부했다.


중학생이 된 뉴턴은 성적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연 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읽은 책을 부문별로 나누어 독후감을 적어 놓았다. 그 외에도 작은 공구, 발명, 실험 등을 좋아했다. 1661년, 뉴턴은 근로 장학생 자격으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1664년에는 장학금 수여자가 되었고 1665년에는 학사 학위를 받았다. 베로라는 학자는 뉴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대학원생으로 추천하여 자연과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1665년,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케임브리지는 휴교에 들어갔고 뉴턴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1665~1666년, 뉴턴은 거장들의 과학연구 방법 등을 실제적으로 운용해 이항정리를 세우고 미적분법을 알아냈다. 또 프리즘을 이용해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며 각 색광은 굴절율이 다르다는 사실 등을 알아냈다. 뉴턴은 데카르트가 지구의 역학을 천체 현상에 응용하고자 했던 생각을 계승했다. 그는 행성의 타원 궤도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사과의 낙하와 달이 지구를 도는 것을 연관지었다. 1667년, 뉴턴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와베로 교수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과학 연구에 몰두했다.

 

만유인력 법칙
비단 지구와 물체뿐만이 아니라 천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 사이에는 상호 작용하는 힘이 있으므로 보편적이란 뜻의 '만유'를 붙여 중력을 '만유인력'이라 하였다. 따라서 지구의 지표면 위에서 작용되는 지구의 중력과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게 되므로 밤낮이 발생하며,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면서 상호간에 인력이 작용하므로 밀물과 썰물을 발생하게 된다.

 

1667년 베로 교수는 그를 루카스 석좌 교수직에 추천해 부임하게 되었다. 뉴턴은 이 일을 스물여섯에 시작해 쉰세 살까지 했다. 1672년, 뉴턴은 런던 왕실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라는 한 시대에 획을 그은 저서를 세상에 발표했다. 이 책은 3대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초로 완벽한 역학 이론의 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모든 역학 현상을 설명하고 행성의 운동, 낙하하는 물체의 윤동, 진동자 운동, 미립자운동, 소리와 파장, 밀물과 썰물 및 지구의 원반상 등 각종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로 200여 년간, 누구도 그의 본질적 이론을 깨지 못했고 20세기에 양자학과 상대성 이론이 나온 뒤에야 역학의 범주가 확대되었다.

 

1696년 뉴턴은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친구의 요청으로 조폐국 부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뉴턴은 몇 년에 걸쳐 영국 화폐제도의 혼란을 해결했고, 1699년에는 조폐국 국장으로 승진했다. 1703년, 뉴턴은 왕실학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에 그는 다시 《광학, 《3차 곡선론, 《유율론》, 《급수해석학》, 《유율과 무한급수》 등의 저서를 남겼다.

 

1727년 3월, 여든네 살의 뉴턴은 왕실학회 모임 뒤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3월 20일 새벽을 맞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임종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는 해안에서 놀고 있는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매끄러운 조약돌과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조개껍질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는 소년, 내 눈앞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리를 가득 안은 커다란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반응형
반응형

예수, 기독교의 창시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예수
입니다 :)

 

예수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

 

생몰년 : 서기전 4~ 서기 30년 
국    적 : 이스라엘 
출생지 : 베들레헴 
성    격 : 의지가 굳고 관용적임 
신    분 : 기독교 창시자 
가    정 :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으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질고 정숙한 주부였다. 

오늘날 '서기(서력기원)' 라는 개념은 예수가 탄생한 해를 그 시점으로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예수는 서력 기원 원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서기전 3~4년 즈음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이사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여호수아(Joshua)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으나 후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예수라고 불렸다. 

예수가 태어나던 때 집안이 가난해 온 가족이 아버지 요셉 한 사람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태민족은 일찍이 모세 시절부터 대대로 집에서 민족 문화를 가르쳤으므로 예수는 사회와 문화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참배를 갔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부모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여전히 교회에 앉아서 교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질문을 했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아들아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러느냐?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오히려 "왜 저를 찾아다니셨나요? 제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신단 말인가요"라고 반문했다. 
그의 대답에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 라는 말이 '하느님'을 일컫는 것인 줄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열 두 살의 예수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는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나사렛으로 돌아온 후에 예수의 생활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서른 살이 되던 때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 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서른 살을 전후에 요단강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신성한 뜻에 따라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며 '인간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느님의 어린 양', 즉 하느님을 위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짊어질 구세주가 되었다. 
이후에 예수는 널리 포교활동을 펼쳤는데 그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무료로 병을 고쳐주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숭배하며 따르게 되었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12명의 제자를 골라 그들에게 늘 천국의 말씀을 들려주며 가르침을 주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성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이러한 교의를 핵심으로 하는 기독교는 박해받는 유태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예수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한 유태교회의 최고 통치권은 예루살렘 최고 공회가 가지고 있었다. 
나날이 커지는 예수의 영향력은 최고 공회의 불만을 샀고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최고 공회는 예수에게 '왕을 사칭한 죄' 를 씌워 잡아들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신도들은 계속해서 기독교를 전파했고 기독교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반응형
반응형

유스티니아누스1세, <로마법전>을 편찬한 중흥의 패왕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1세
입니다 :)

 

유스티니아누스1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1세, <로마법전>을 편찬한 중흥의 패왕

 

생몰년: 483~565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마케도니아의 타우레시움 
성 격 : 영웅심이 가득하고 무력을 즐김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농민 가정 출신 

소년기의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 유스티누스와 마을 청년 두 사람을 따라 입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되었다. 
신체가 건장한 그들은 근위병에 선발되어 아나시타우스의 시위(임금이나 우두머리를 모시거나 호위함)를 맡게 되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아나시타우스가 죽고 난 뒤에는 황제에 옹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양자의 신분으로 유스티누스를 도와 국내외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었다. 
527년 유스티누스가 죽자 유스티니아누스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 후 자신을 위해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서쪽 영토(서로마 제국)의 수복과 기독교 로마 제국의 회복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밤낮으로 온 힘을 기울여 거의 미칠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시 사람들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사람이 아니고 휴식이 필요 없는 악마가 틀림없다!' 고 말하곤 했다. 

528년, 그는 토리보니아누스 등 16명의 법학자에게 <로마법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534년, 6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했다. 
법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는 <칙법휘찬, Codex>으로 로마제국의 개국이래 공포된 모든 법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시기에 맞지 않는 부분은 삭제한 것이다. 
두번째는 <학설휘찬, Digesta>인데 역사 이래로 관련된 법률 서적 및 문헌 중에서 대표적인 부분만을 정리한 것으로 실질적인 한 편의 방대한 '법률사상사' 였다. 
마지막은 <법학제요, Institutiones>로 법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전공 서적이었다. 
이 법률 문헌들은 <로마법대전> 또는 <로마법전>으로 불리며 유럽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법전이다. 
이 법전에서 무한한 사유제의 개념을 통일했고 공법과 사법을 구분해 뒤에 유럽 각국의 법률 연구와 제정의 기초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로 비잔틴은 경제적인 안정과 도시의 번영을 맞이했으며 상공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제국은 정치적으로 부패해 거대한 관료기구와 비대해진 군대는 국고를 낭비하여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532년 비잔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놀란 나머지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황후 테오도라의 격려를 받으며 정신을 차리고 군대를 지휘해 반란을 진압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기간에 걸친 대외 전쟁은 제국의 군사력과 재정을 고갈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서쪽 지역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슬라브인들과 흉노족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특히 548년, 슬라브족이 콘스탄티노플에 대규모로 침공해 왔을 때 많은 금을 잃었다. 
흉노족 또한 558년 수도로 밀고 들어와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갔다. 
560년 이후에는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가 남겨준 32만 파운드의 황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국고는 바닥이 나버렸고 경제적으로 붕괴 위기에 처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나라 안팎의 어려움들에 속수무책이어서 신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다가 565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반응형

호메로스, Homeros, 가장 위대한 서사시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호메로스
입니다 :)

호메로스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호메로스, Homeros, 가장 위대한 서사시인

 

생몰년: 서기전 9~8세기 
국적 고대 그리스 
출생지 : 소아시아 스미르나 
성격: 지혜로우며 박학다식, 상상력이 풍부함 
신 분 : 시인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존경받던 민족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호메로스는 나이 든 맹인 가수로 유랑 생활을 하며 <호머의 서사시>(일리아드, 오디세이아 두 편을 포함)와 그 밖의 많은 시를 지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내용으로 판단해 보건데 호메로스는 서기전 9세기에서 8세기경 사람으로 보인다.


<호머의 서사시>는 유럽에 전해 내려오는 문학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리아드>는 총 24권 15,693행으로 트로이 전쟁의 전설을 소재로 그리스 사회의 전환기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 연합군 대장 아가멤논이 아폴론 신전 제사장의 딸을 납치한다.


그러자 아폴론이 신의 화살로써 수많은 그리스인들을 벌하여 죽이고 그리스 군영에 역병을 내렸다.


용맹한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제사장의 딸을 풀어줄 것을 단호하게 요청했으나 치욕만 당하고 말았다.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출정을 거부하자 그리스인들은 싸울 때마다 계속 패한다.


그러자 트로이인들을 통솔하던 헥토르는 해변에서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고 여세를 몰아 그리스인들의 군함을 불태우며 그들을 무찔렀다.


이 다급한 시기에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방패를 빌려 트로이인들의 공격에 맞서 나갔다.


그러나 트로이 성문까지 반격해 들어갔을 때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갑옷과 방패를 빼앗아 간다.


친했던 전우의 죽음은 아길레우스를 끝없는 회한에 잠기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다시 전투에 임해 헥토르를 죽이고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오디세이아>는 총 24권, 12,110행으로 이루어졌다.

 

트로이 전쟁이 종결된 후 그리스 영웅과 이타카국의 오디세이아 국왕이 고향으로 돌아가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오디세우스와 그의 동료는 풍랑을 만나 바다 위에서 장장 10여 년의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로토스 열매를 먹는 족속, 사람을 잡아먹는 외눈 거인 퀴클롭스, 바람 신 아이올로스와 칼립소 여신 등을 만나며 갈립소에 의해 7년간이나 억류당하기도 했다.


후에 그들은 바다 여신의 도움으로 파이아케스인들이 살고 있는 '스케리아' 섬으로 떠밀려 갔다가 국왕의 도움으로 고향인 이타카 섬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표류하던 기간 중 마지막 3년 동안 그의 고향에서는 구혼자 백여 명이 몰려들어 그의 아름다운 아내인 페넬로페에게 청혼한다.


그들은 종일 그곳에서 먹고 마시며 연회를 열어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국에 돌아온 후에 먼저 아들을 만난 후 거지 분장을 하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회를 노려 자신의 아내에게 청혼한 자들을 처치한 후 재산을 탈환하고 아내 페넬로페와 만나 다시금 이타카국의 왕위에 오른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 지리, 역사, 철학,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유럽의 수많은 작가들은 이 두 편의 서사시에 담긴 이야기와 인물 가운데서 소재를 찾기도 했다.


호메로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