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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1세, <로마법전>을 편찬한 중흥의 패왕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1세
입니다 :)

 

유스티니아누스1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1세, <로마법전>을 편찬한 중흥의 패왕

 

생몰년: 483~565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마케도니아의 타우레시움 
성 격 : 영웅심이 가득하고 무력을 즐김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농민 가정 출신 

소년기의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 유스티누스와 마을 청년 두 사람을 따라 입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되었다. 
신체가 건장한 그들은 근위병에 선발되어 아나시타우스의 시위(임금이나 우두머리를 모시거나 호위함)를 맡게 되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아나시타우스가 죽고 난 뒤에는 황제에 옹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양자의 신분으로 유스티누스를 도와 국내외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었다. 
527년 유스티누스가 죽자 유스티니아누스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 후 자신을 위해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서쪽 영토(서로마 제국)의 수복과 기독교 로마 제국의 회복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밤낮으로 온 힘을 기울여 거의 미칠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시 사람들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사람이 아니고 휴식이 필요 없는 악마가 틀림없다!' 고 말하곤 했다. 

528년, 그는 토리보니아누스 등 16명의 법학자에게 <로마법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534년, 6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했다. 
법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는 <칙법휘찬, Codex>으로 로마제국의 개국이래 공포된 모든 법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시기에 맞지 않는 부분은 삭제한 것이다. 
두번째는 <학설휘찬, Digesta>인데 역사 이래로 관련된 법률 서적 및 문헌 중에서 대표적인 부분만을 정리한 것으로 실질적인 한 편의 방대한 '법률사상사' 였다. 
마지막은 <법학제요, Institutiones>로 법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전공 서적이었다. 
이 법률 문헌들은 <로마법대전> 또는 <로마법전>으로 불리며 유럽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법전이다. 
이 법전에서 무한한 사유제의 개념을 통일했고 공법과 사법을 구분해 뒤에 유럽 각국의 법률 연구와 제정의 기초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로 비잔틴은 경제적인 안정과 도시의 번영을 맞이했으며 상공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제국은 정치적으로 부패해 거대한 관료기구와 비대해진 군대는 국고를 낭비하여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532년 비잔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놀란 나머지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황후 테오도라의 격려를 받으며 정신을 차리고 군대를 지휘해 반란을 진압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기간에 걸친 대외 전쟁은 제국의 군사력과 재정을 고갈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서쪽 지역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슬라브인들과 흉노족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특히 548년, 슬라브족이 콘스탄티노플에 대규모로 침공해 왔을 때 많은 금을 잃었다. 
흉노족 또한 558년 수도로 밀고 들어와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갔다. 
560년 이후에는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가 남겨준 32만 파운드의 황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국고는 바닥이 나버렸고 경제적으로 붕괴 위기에 처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나라 안팎의 어려움들에 속수무책이어서 신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다가 565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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