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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비, Diana, 영국의 장미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다이애나 왕비
입니다 :)

 

다이애나 왕비, 영국의 장미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이애나 왕비, 영국의 장미

 

생몰년 : 1961~1997 
국    적 : 영국 
출생지 : 노샘프턴셔주 
성    격 : 온유, 성실, 완강 
신    분 : 자선 활동 대사 
가    정 :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2세의 시종, 어머니는 퍼모이 남작의 딸 

다이애나 프란시스 스펜서는 태어날 때 몸무게가 7파운드 12온스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두고 '완전무결한 체격의 표준'이라고 표현했다. 
다이애나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았다. 
또한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우아한 품성을 배양해 하인들은 그녀를 '여백작'이라고 불렀다. 
1979년 다이애나는 '영 잉글랜드 스쿨'의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귀족 신분의 그녀가 유치원 교사가 된 이유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1980년, 다이애나는 영국 왕실의 전통적인 모임에서 그녀보다 12살 많은 찰스 왕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1981년 7월 29일 다이애나는 국민들의 환호성 속에서 런던의 성 폴 성당으로 걸어 들어가며 찰스 왕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통계에 따르면 그날 세계의 7.5억 인구가 텔레비전을 통해 그들의 천상에서와 같은 낭만적 혼인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결혼 후에 매스미디어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녀는 겸손한 태도와 온화함으로 대중들에게 친근함을 주어 존경과 추대를 받았다. 
1982년 6월 21일, 다이애나는 순조롭게 첫째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1984년 9월 15일 다이애나는 또 두 번째 왕자인 해리를 출산했다. 
다이애나는 아이들을 낳았다고 해서 사회 활동에 대한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여왕이나 태후 그리고 찰스와 같은 영국 왕실의 그 어떤 구성원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것은 보수적인 왕실에 있어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이애나와 찰스 사이에도 차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카밀라라는 연인의 출현은 두 사람 사이의 장벽과 불일치를 더욱 부추겼다. 
1986년, 찰스는 공개적으로 카밀라를 '평생의 사랑'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다이애나와 찰스의 시대적 혼인 관계는 끝을 맺게 되었다. 
1996년 다이애나와 찰스는 결국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끝냈다. 

결혼 실패라는 어두운 곤경에 처해서도 다이애나는 공익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이즈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감싸주었고, 앙골라에서 지뢰 제거 활동을 홍보했다. 
아울러 지뢰 사용 금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생활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은 아름답고 선량한 이를 질투했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애인인 도디 알 파예드와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여 고속질주하다 그만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일찍이 한 기자는 다이애나의 죽음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전 유럽 최대의 슬픔이었다고 말했다. 
1997년 9월 6일 영국 왕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다이애나를 위한 성대한 영결식을 거행했다. 
버킹엄 궁전은 역사상 처음으로 황기를 내리고 국기로 바꾸었으며, 반기를 걸고 애도의 뜻을 표하며 '왕실의 스타' 다이애나를 기념했다.


다이애나 왕비의 명언

 

언론은 잔인하고 포악하다.

그들은 어떤 일에도 너그럽지 않으며 오로지 잘못에만 흥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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