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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입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최고 통치자

 

생몰년: 서기전 100~44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로마성 밖의 농장 
성 격 : 포부가 원대하고 용맹하여 지략이 뛰어났음 
신 분 :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가 정 : 로마 귀족 율리우스의 후예 


카이사르는 고대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젊어서 급작스럽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로마의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업적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넘어선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소년기에 이미 비범한 포부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급변하는 로마 공화국에서 큰 업적을 세우고자 했다. 
서기전 84년, 카이사르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콘스탄틴과 결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와 이혼하고 평민당 지도자인 곡시우스 코르넬리우스 신나의 딸 코넬리아를 아내로 맞았다. 
슐라가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정적 신나를 죽이자 그는 젊은 카이사르의 재능을 높이 사 코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권했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했다. 
슐라는 이에 화를 내며 카이사르가 물려받은 재산과 그의 지참금까지 몰수하고 그를 처형하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이 소문을 듣고 로마를 떠나 서기전 78년 슐라가 죽은 후에야 고향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이후 카이사르는 신속히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는 웅변과 강개함, 열정적으로 공무에 임하는 태도와 개혁파의 모습으로 대중의 호감을 샀다. 
또한 평민과 일부 상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도 널리 이름을 날렸다. 
서기전 73년 그는 최고 제사장에 뽑혔고 이후 재정관, 시정관, 대제사장, 대법관 등 고위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서기전 60년 로마 집정관의 폼페이우스, 크라소스와 결성해 '삼두 동맹' 을 결성했다. 
이 두 사람의 지지로 카이사르는 서기전 59년 로마 집정관(콘술)의 자리에 올랐고 임기가 만료된 후에는 갈리아(켈트) 총독을 맡았다.(서기전 58~51년) 
갈리아 총독 재임시 카이사르는 전쟁에 능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냈다. 
이 군대는 갈리아 전역을 정복했고 라인강(당시 이름 레누스 강)을 넘어서 게르만 지역까지 공격했다. 
또한 두 번에 걸쳐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 섬을 침략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해 원로원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크라소스가 죽은 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모의하여 카이사르의 군권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카이사르는 이에 무력으로 맞서기로 결정하고 5년간의 내전을 거쳐(서기전 49~45년), 폼페이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정적을 제거하고 로마 전역을 정복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독재자로 선포하고 최고의 정치권력을 획득했으며 군주라는 칭호가 없는 군주가 되었다. (군주라는 칭호는 없었지만 사실상 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제도와 공민권, 통치 법규와 정치체제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고도로 집중된 중앙집권제를 완성하고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대제국을 세웠다. 
이 중 몇 가지 조치는 후대에 미친 영향이 자못 컸다. 

그는 일찍이 벽에 로마에서 발생한 중대사와 원로원 회의의 보고서를 쓰도록 했는데 이것은 현대 신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도해 제작한 카이사르 달력(율리우스 달력이라고도 함, 이집트인이 쓰던 달력을 고쳐 만들었음)은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또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안 책력은 이 역법에 기초해서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의 많은 마차를 일방으로만 통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현대 교통 관리의 기원이 되고 있다. 
또한 그가 쓴 <갈리아 전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갈리아와 라인강 동쪽 유역의 지리, 풍속 등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카이사르의 권력 독점에 대해 원로원의 귀족 세력들은 시종 불만을 품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56세 되던 서기전 44년, 결국 이들은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죽이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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