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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더포드, Rutherford,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러더포드
입니다 :)

 

러더포드, 물리학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러더포드, Rutherford,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생몰년 : 1871~1937년
국 적 : 뉴질랜드
출생지 : 브라이트 워터
성 격 : 겸허하고 끈기 있음

신 분 : 과학자

가 정 : 아버지는 공예가였고 어머니는 시골학교 선생님이었음

 

러더포드는 어려서 가정환경이 열악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학 실험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1882년, 그는 장학금을 받고 넬슨 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10년간의 중학교 공부는 수학과 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수학의 기초를 닦고 많은 물리실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1892년, 러더포드는 우수한성적으로 뉴질랜드 켄터베리대학 수학과에 합격했다. 1894년 그는 수학과 물리에서 공히 1등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러더포드는 장학금을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무선전신을 연구하게 되었다.


1896년, 러더포드는 톰슨의 건의를 받아들여 연구 방향을 방사능으로 바꾸었다. 1897년, 그는 우라늄 방사선이 두 가지 성분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가지는 흡수성을 가진 것으로 그는 이것을 알파선이라고 이름 지었다. 다른 것은 투과성이 강한 광선으로 그는 이것을 베타 광선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동시에 실험을 통해 투과성이 더욱 강한 광선이 있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이것이 후에 발견되어 그가 이름 붙인 감마 광선이었다.

 

1898년, 러더포드는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학업을 마친 후 톰슨의 추천으로 캐나다의 맥길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맡게 되었다. 러더포드는 영국에서 온 청년 화학자 소디와 합작해 1902년 먼서방사성 원소의 반감기를 발견했다. 1903년 5월, 러더포드와 소디는 알파선과 베타 광선의 전장과 자장에서의 편향도로 각기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입자 구성으로 나뉜다는 것을 변별해냈다. 방사성 원소의 원소 붕괴에 따라 하전입자가 나오면서 성질이 다른 새로운 원소로 바뀐다는 것도 알아냈다. 또한 초기의 라듐, 토륨, 우라늄의 붕괴도를 열거하며 알파선의 에너지가 방사성 원소 복사에너지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후에 그들이 알파선으로 원자 구조의 폭탄을 연구하는 데 근거가 되었다. 같은 해, 러더포드는 영국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1905년, 그는 방사성 원소의 함량과 반감기를 이용해 태양의 수명이 약 50억 년 되었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이는 방사성 원소 반감기로 광석, 유물과 천체의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의 효시가 되었다.

 

1907년, 러더포드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계속해서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우선 베타선의 전하, 알파선의 대전량과 원자량을 계산해 냈고 다른 사람과 함께 감마선의 성질과 파장을 측정해 냈다. 1908년, 러더포드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19년부터 러더포드는 J. J. 톰슨의 뒤를 이어, 캐번티시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강단에 섰다. 러더포드는 캐번디시 연구소를 새로운 고지에 올라설 수 있도록 지도하여 물질의 미시적 구조의 연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한편 우수한 청년 과학자들을 다수 배출해 냈다. 1921년, 러더포드는 자신의 원자 모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정리했다.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로 구성되며 원자핵은 원자의 대부분의 질량을 차지하며 전자는 원자핵을 둘러싸고 돌고 있다. 또한 원자핵의 전량은 전자전량의 총합과 같다."


1925년, 러더포드는 런던 왕립학회 회장이 되었다. 러더포드는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실험 과학자로 평생 동안 논문 215편을 발표했다. 또 《뇌의 비교생리학과 비교심리학》을 비롯하여 책 6권을 썼으며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냈다.


1937년 10월 19일, 러더포드는 66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뉴턴 묘지 옆에 안장하여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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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퀴리부인
입니다 :)

퀴리부인,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생몰년 : 1867~1934년
국 적 : 프랑스 폴란드 출생
출생지 :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성 격 : 인내심 강하고 내향적임
신 분 : 과학자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마리 퀴리(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면서 마리를 퀴리 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함)의 아버지는 중학교 수학과 물리 교사였다. 마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물리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마리는 여섯 살에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열네 살에는 바르샤바 공리 여중을 다녔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졸업했는데 성적이 우수해 학교에서 수여하는 금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 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외 유학을 시킬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리는 5년간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1891년, 마리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 이과부에 들어갔고 189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물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894년, 마리는 프랑스 실업촉진위원회의 부탁을 받고 각종 금속의 자성에 대해 연구했다. 이 기간에 그녀는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잘 통해 1895년에 결혼했다. 당시 프랑스 물리학자 베크렐은 우라늄염에서 모종의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방사선이 기체를 이온화한다는 것과 X선과는 달리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굽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우라늄염이 어째서 이런 방사선을 방출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퀴리부인은 베크렐의 발견에 흥미를 느껴 곧 이것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수차례의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방사성이 강한 원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피에르도 퀴리부인의 연구에 참여했고 결국 1897년 7월, 퀴리 부인은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 퀴리 부인은 이 원소를 폴로늄(원소 기호는 Po)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시 제정 러시아에 짓밟힌 조국 폴란드(poland)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12월 퀴리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방사성이 더 강한 원소를 발견했다. 이 원소는 컴컴한 곳에서도 스스로 빚을 낼 수 있었다. 퀴리 부인은 이 새로운 원소를 라듐이라고 이름 지었다. 라듐이라는 이름은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인 'radius'에서 비롯된 것이다.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두 가지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라듐을 추출해 과학계에 자신의 발견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45개월간의 분투함에 퀴리부인은 결국 1902년 1/10그램의 라듐을 얻어 라듐의 원소량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03년, 퀴리 부부와 베크렐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인은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은 여성이 되었다. 

 

1909년 4월 19일, 피에르는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불행히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퀴리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혼자서 그들의 공동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는 1910년 금속 라듐의 분리에 성공했고 라듐의 원소량을 235로 확정했다. 같은 해, 그녀는 명저인 《방사성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1911년, 퀴리부인은 라듐 연구에서 중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 인정되어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라듐의 발견과 활용은 퀴리부인을 세계적 명성을 가진 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첫 번째 여자 회원이자 파리 대학의 첫 번째 여자 교수였다. 그녀는 일생을 통해 7개국에서 상장과 상패를 24회나 받았고 25개국에서 100 여개의 명예직을 받았다. 그럼에도 퀴리 부인은 시종 겸손하고 고 귀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 퀴리 부인은 만년에도 계속 부지런히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장기간 방사성 원소에 노출되어 그녀는 악성 백혈병을 앓게 되었다. 1934년 7월 4일, 67세의 퀴리부인은 실험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에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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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Nobel, 노벨상을 만든 폭탄제조의 대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노벨
입니다 :)

 

노벨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노벨, Nobel, 노벨상을 만든 폭탄제조의 대가


생몰년 : 1833~1896년

국 적 : 스웨덴

출생지 : 스톡홀롬
성 격 : 의지가 강함, 사색적
신 분 : 과학자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는 기술자였음

 

노벨은 네 살 때 온 가족이 핀란드로 이주했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스웨덴어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노벨 삼 형제를 위해 스웨덴 출신의 가정교사를 구했다. 가정교사는 학식이 뛰어나 노벨의 형제들에게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국 언어를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지식도 함께 가르쳤다.

 

1850년, 아버지는 노벨을 미국으로 보내 기계를 공부하도록 했다. 2년 뒤, 노벨은 러시아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노벨이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를 도와 몇 년 동안 수뢰와 폭탄 만드는 일을 하던 노벨은 점점 폭탄을 연구하는 쪽으로 흥미가 기울었다.


1847년, 이탈리아 화학자 소브레로가 니트로글리세린을 발명했다. 이 글리세린은 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폭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브레로는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성을 통제할 수 없어 연구를 중단했다. 노벨은 만약 니트로글리세린과 중국에서 발명한 화약을 섞으면 위력적인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기에 착안해 반복된 실험을 실시했고 결국 니트로글리세린 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화약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는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노벨은 계속 연구하며 화약을 대체할 기폭제를 찾기 시작했다. 1864년 9월 3일, 노벨의 실험실이 큰 소리가 나면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노벨의 동생을 포함한 조수 5명이 사망했다. 노벨은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노벨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도 노벨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스톡홀롬 교외의 마라렌 호수로 실험실을 옮겼다. 그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뇌산수은이 진동에 매우 민감해서 마찰이나 충격을 받으면 즉각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노벨은 수백 차례에 걸친 실험 끝에 이상적인 기폭장치인 뇌관을 만들어 냈다. 뇌관의 발명은 폭탄 제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이것은 곧 폭탄 발명과 다름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1865년, 노벨은 정식으로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을 열어 독일 함부르크 등지에 폭탄 회사를 세웠다. 당시 유럽은 공업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로 개간, 도로 건설, 탄광 개발 등 분야에서 폭탄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의 회사에는 주문서가 폭주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작은 진동에도 불안정하다보니 운반 중 폭발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한 번은 니트로글리세린을 가득 실은 '유러피언' 호가 대서양을 건너다가 큰 폭풍우를 만났다. 배는 심하게 흔들렸고 니트로글리세린이 폭발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각국 정부는 노벨의 폭탄 운송을 엄격히 금지했다.


노벨은 폭탄을 안전하게 운송할 방법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힘든 연구로 수많은 좌절을 겪은 후에 마침내 다이너마이트, 폭발성 젤라틴, 발리스타이트를 차례로 발명했다.

 

노벨은 일생 동안 255개의 특허권을 따냈는데 그중 129개가 폭탄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등 10여 개 국가로 공장을 확장해 나가 당시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었다. 노벨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1895년 11월 27일, 노벨은 자신의 재산 20만 달러를 은행 기금으로 예치하라는 유서를 작성했다. 아울러 이 기금의 이윤으로 매년 세계의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생리, 의학 분야에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으로 주도록 했다.

 

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상이다. (1968년에 노벨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1896년 12월 10일 노벨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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