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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퀴리부인
입니다 :)

퀴리부인,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생몰년 : 1867~1934년
국 적 : 프랑스 폴란드 출생
출생지 :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성 격 : 인내심 강하고 내향적임
신 분 : 과학자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마리 퀴리(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면서 마리를 퀴리 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함)의 아버지는 중학교 수학과 물리 교사였다. 마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물리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마리는 여섯 살에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열네 살에는 바르샤바 공리 여중을 다녔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졸업했는데 성적이 우수해 학교에서 수여하는 금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 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외 유학을 시킬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리는 5년간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1891년, 마리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 이과부에 들어갔고 189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물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894년, 마리는 프랑스 실업촉진위원회의 부탁을 받고 각종 금속의 자성에 대해 연구했다. 이 기간에 그녀는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잘 통해 1895년에 결혼했다. 당시 프랑스 물리학자 베크렐은 우라늄염에서 모종의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방사선이 기체를 이온화한다는 것과 X선과는 달리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굽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우라늄염이 어째서 이런 방사선을 방출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퀴리부인은 베크렐의 발견에 흥미를 느껴 곧 이것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수차례의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방사성이 강한 원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피에르도 퀴리부인의 연구에 참여했고 결국 1897년 7월, 퀴리 부인은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 퀴리 부인은 이 원소를 폴로늄(원소 기호는 Po)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시 제정 러시아에 짓밟힌 조국 폴란드(poland)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12월 퀴리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방사성이 더 강한 원소를 발견했다. 이 원소는 컴컴한 곳에서도 스스로 빚을 낼 수 있었다. 퀴리 부인은 이 새로운 원소를 라듐이라고 이름 지었다. 라듐이라는 이름은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인 'radius'에서 비롯된 것이다.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두 가지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라듐을 추출해 과학계에 자신의 발견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45개월간의 분투함에 퀴리부인은 결국 1902년 1/10그램의 라듐을 얻어 라듐의 원소량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03년, 퀴리 부부와 베크렐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인은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은 여성이 되었다. 

 

1909년 4월 19일, 피에르는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불행히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퀴리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혼자서 그들의 공동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는 1910년 금속 라듐의 분리에 성공했고 라듐의 원소량을 235로 확정했다. 같은 해, 그녀는 명저인 《방사성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1911년, 퀴리부인은 라듐 연구에서 중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 인정되어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라듐의 발견과 활용은 퀴리부인을 세계적 명성을 가진 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첫 번째 여자 회원이자 파리 대학의 첫 번째 여자 교수였다. 그녀는 일생을 통해 7개국에서 상장과 상패를 24회나 받았고 25개국에서 100 여개의 명예직을 받았다. 그럼에도 퀴리 부인은 시종 겸손하고 고 귀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 퀴리 부인은 만년에도 계속 부지런히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장기간 방사성 원소에 노출되어 그녀는 악성 백혈병을 앓게 되었다. 1934년 7월 4일, 67세의 퀴리부인은 실험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에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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