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뢴트겐, Roentgen, 엑스선(X-Ray)의 발견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뢴트겐
입니다 :)

 

뢴트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뢴트겐, Roentgen, 엑스선(X-Ray)의 발견자

생몰년: 1845~1923년

국 적 : 독일

출생지 : 프로이센의 레네트

성 격 : 강직하고 겸허함

신 분 : 과학자
가 정 : 중산층 출신, 아버지는 상인이었음

 

뢴트겐은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라인 강을 지나 네덜란드의 큰 도시인 위트레흐트로 왔다. 그는 위트레흐트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뢴트겐은 어려서 운동을 좋아하고 장난꾸러기였으며 학교 성적은 중간쯤이었다. 한 번은 친구를 돕다가 선생님의 오해를 사서 퇴학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865년, 뢴트겐은 스위스 취리히 공과 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베르타를 알게 되었다. 1869년에 대학을 졸업한 뢴트겐은 쿤트교수의 조수가 되었고 1871년에는 베르타와 결혼했다.


뢴트겐은 빠른 시간 안에 인구 성과를 거두어 1874년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강사를 맡게 되었고 후에 다시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뢴트겐은 쿤트교수와 한께 직접 만든 측정 장치로 '빛'과 '자기'의 관계를 명확히 연구해냈다. 1879년, 그는 독일 기센 대학교 물리학 교수와 물리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뢴트겐은 이미 독일 물리학계의 권위 있는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패러데이에 앞서 '뢴트겐 전류' 를 증명해 냈다.

 

1894년, 뢴트겐은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장이 되었고 음극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엑스선을 발견한 것이다.

 

일찍이 1861년 영국 과학자 윌리엄 크룩스는 음극선관에 전기를 통과시켜 방전으로 생겨난 광선을 발견하여 찍어보았다. 그러나 현상한 후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크룩스는 몇 번이고 다시 반복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크룩스는 위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895년, 뢴트겐도 이 현상을 발견하고는 7일 동안 계속 실험했다. 그는 검은 종이로 크룩스관을 싸고 방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뢴트겐은 전류가 통과할 때 2미터 밖의 시안화백금바륨을 칠한 종이가 형광을 내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가 끊기고 난 후에 형광은 사라졌다. 뢴트겐은 이것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광선이며 종이와 알루미늄 등 밀도가 작은 물질은 통과할 수 있지만, 납 같은 밀도가 높은 물질은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크룩스관과 시안화백금바륨 종이 사이에 손을 뻗었을 때, 뼈 그림자가 비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뢴트겐은 새로 발견한 광선을 엑스선이라고 불렀다. 12월 28일, 뢴트겐은 뷔르츠부르크 물리 의학 학회지에 엑스선의 사진을 첨부한 논문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를 발표했다. 뢴트겐의 발견은 즉각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즉각 뢴트겐을 접견하고 바이에른 왕관 공로훈장을 내렸다.

 

뢴트겐은 인품이 고상했고 영예와 금전에 초연했다. 1901년, 그는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 수도 스톡홀롬으로 가서 노벨상을 받을 때 식장에서의 연설을 사양했으며 각종 초청에도 거절한 채 독일로 돌아왔다. 아울러 상금은 모두 뷔르츠부르크 대학 연구기금으로 내놓았다. 많은 상인들이 고가로 엑스선의 특허권을 사들여 폭리를 취하려 했으나 뢴트겐은 모두 거절했다.


뢴트겐의 위대한 발견으로 사람들은 물질의 내부를 투시해 볼 수 있는 신비의 열쇠를 손에 쥐게 되었다. 또한 그의 발견은 과학자들에게 원자와 분자의 결합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DNA의 구조 등과 같은 중대한 발견도 모두 엑스선의 사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울러 엑스선의 의학적 응용으로 수많은 생명 을 구해냈다.


1923년 2월 10일, 뢴트겐은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한 집에다 뢴트겐 기념관을 세워 인류들 위해 남긴 위대한 공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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