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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Churchill,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처칠
입니다 :)

 

처칠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처칠, Churchill,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생몰년 : 1874~1965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옥스퍼드셔 블렌엄 궁

성 격 : 꿋꿋하고 자신감과 유머가 넘침
신 분 : 정치가, 문학가

가 정 : 귀족 가문 출신

 

처칠은 일곱 살부터 아스콧의 세인트 조지 예비학교와 브라이튼 예비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제멋대로이며 고집이 세고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대학에 갈 기회마저 잃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그를 샌드허트스 육군 사관학교에 집어넣었다. 1895년, 장교학교를 졸업하고 처칠은 제4경기병대에 기병 소위로 배치받아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00년까지 그는 장교와 종군 기자 신분으로 영국의 쿠바 진압 및 인도의 북서 변경 지부에 있는 파타족 진압 작전,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 등에 참가했다.


1900년, 처칠은 보수당 후보로 경선에 참가해 하원의원이 되었다. 1904년, 그는 다시 자유당에 가입했다. 자유당이 1906년 대선에서 참패하고 그는 식민 차관, 통상장관, 내무장관을 지냈다. 1908년, 처칠은 귀족 후예인 클레멘타인 호저와 결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그는 혁혁한 지위의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경솔하게 흑해 해협의 전투를 지휘하려다가 참패를 당했다. 영국군 사망자가 20여만 명에 달해 그는 해임되었다.

1922년, 처칠은 볼드윈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을 맡아 1929년까지 일했다. 1937년, 네임 체임벌린이 정권을 잡고 유화 정책이 영국의 주요한 외교 정책이 되었다. 처칠은 독재 국가들이 평화에 크게 위협이 될 것임을 감지하고 영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거듭 경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날 밤, 처칠은 다시 해군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네임 체임벌린이 정계를 떠나고 영국왕 조지 6세는 처칠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당시 영국은 극단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모두 독일의 손에 넘어갔고 동맹국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을 선언했다. 나치 공군은 다시 영국에 대규모 기습을 가하고 있었다. 영국은 순식간에 지원도 없이 혼자서 전쟁에 나서야 하는 국면에 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면에 처해서 처칠은 강경하고 호기어린 자세로 나치와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것은 국민들에게 큰 믿음을 주었고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동시에 그는 외교적으로 미국, 소련과 연합해 국제적인 반독재 통일 전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2달 뒤 처칠이 포츠담에서 트루먼, 스탈린과 고위급 회의를 열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이끄는 보수당이 새로운 1기 의회 선거에서 참패했고, 자신이 더 이상 영국의 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칠은 수상직을 사임했으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국내외 정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51년 77세의 고령에도 재당선되었다.


1965년 1월 초, 처칠은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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