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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황제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입니다 :)

 

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황제

 

생몰년: 서기전 274~337년 
국  적: 고대 로마 
출생지: 세르비아의 나이수스 
성 격 : 기지가 넘치며 냉혹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는 어렸을 때 교육받을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그는 일찌감치 종군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의 전투에서 용맹함과 기지를 발휘하며 고급 장교를 지냈다. 
갈레리우스가 로마 황제를 계승한 후 콘스탄티누스를 자기 곁에 인질로 잡아두며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의 곁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브리튼 전투를 치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당시 갈리아 군대는 그의 아버지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재능 있고 용감하며 활력이 넘치는 이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6년, 그의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죽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카이사르'로 추대하고 그를 '아우구스투스' 로 선포했다. 
이후에 콘스탄티누스는 6년 동안 그의 정적들과 투쟁을 벌여 312년,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를 자칭하던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했다. 
또한 원래 막센티우스의 관할이던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하여 명실상부한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발칸 반도와 이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다른 아우구스투스인 리키니우스와 밀란에서 회합을 가지고 '밀라노 칙령' 에 사인했다. 

그로써 기독교도와 기타 이교도들이 동등한 종교적 자유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그간 몰수된 예배당과 교회재산을 되돌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나아가 국가 정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에 끊이지 않는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323년, 리키니우스를 물리쳤다. 
아울러 이듬해 반란을 기도하고 이민족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사형시켰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다시 통일제국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틴을 수도로 정식 선포했다. 
이는 로마 공화국 제도의 전통을 버리고 군주 전제 제도를 확립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비잔틴은 대형토목 공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이라 명명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성'이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1453년까지의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줄곧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런 이유로 당시의 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 이라 부르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보호하여 그 영향력이 제국 내에서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는 모두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백여 년도 채 안되어 제국 내 토지의 1/10이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현명한 외교 정책으로 수완을 발휘해 제국을 보호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제창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대학을 세워 국가적으로 교수를 초빙하고 그리스어, 라틴어, 문학, 철학, 수사학과 법률을 가르치며 국가의 인재 양성소로 삼았다. 
그는 또한 각 도시의 의사와 교사의 권리를 확대시키고 각지에 학교를 짓도록 명령했으며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학업을 독려했다. 
예술가에게는 공민의 의무를 면해주어 예술 연구와 전수에 힘쓸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통치기간 동안 기독교를 국교로 세우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했지만 스스로가 기독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야 비로소 생의 죄악을 씻어버리기 위해 목사를 불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예순네 살의 '피로로 지친' 이 군주는 보라색의 황제 옷을 벗어버리고 처음으로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입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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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기독교의 창시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예수
입니다 :)

 

예수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

 

생몰년 : 서기전 4~ 서기 30년 
국    적 : 이스라엘 
출생지 : 베들레헴 
성    격 : 의지가 굳고 관용적임 
신    분 : 기독교 창시자 
가    정 :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으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질고 정숙한 주부였다. 

오늘날 '서기(서력기원)' 라는 개념은 예수가 탄생한 해를 그 시점으로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예수는 서력 기원 원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서기전 3~4년 즈음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이사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여호수아(Joshua)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으나 후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예수라고 불렸다. 

예수가 태어나던 때 집안이 가난해 온 가족이 아버지 요셉 한 사람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태민족은 일찍이 모세 시절부터 대대로 집에서 민족 문화를 가르쳤으므로 예수는 사회와 문화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참배를 갔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부모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여전히 교회에 앉아서 교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질문을 했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아들아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러느냐?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오히려 "왜 저를 찾아다니셨나요? 제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신단 말인가요"라고 반문했다. 
그의 대답에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 라는 말이 '하느님'을 일컫는 것인 줄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열 두 살의 예수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는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나사렛으로 돌아온 후에 예수의 생활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서른 살이 되던 때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 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서른 살을 전후에 요단강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신성한 뜻에 따라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며 '인간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하느님의 어린 양', 즉 하느님을 위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짊어질 구세주가 되었다. 
이후에 예수는 널리 포교활동을 펼쳤는데 그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무료로 병을 고쳐주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숭배하며 따르게 되었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12명의 제자를 골라 그들에게 늘 천국의 말씀을 들려주며 가르침을 주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성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이러한 교의를 핵심으로 하는 기독교는 박해받는 유태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예수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한 유태교회의 최고 통치권은 예루살렘 최고 공회가 가지고 있었다. 
나날이 커지는 예수의 영향력은 최고 공회의 불만을 샀고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최고 공회는 예수에게 '왕을 사칭한 죄' 를 씌워 잡아들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신도들은 계속해서 기독교를 전파했고 기독교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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