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간디, Gandhi, 인도의 성웅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간디
입니다 :)

간디, 인도의 성웅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간디, Gandhi, 인도의 성웅

 

생몰년 : 1869~1948년
국 적 : 인도
출생지 : 포르반다르
성 격 : 꿋꿋하고 인자하며 지혜로움
신 분 : 정치가, 사상가
가 정 : 관료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포르반다르의 총리를 지냈음

마하트마(위대한 혼, 큰 성인) 간디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은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그는 현지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두 살에 라지코트의 알프렛 중학교에 들어갔다. 열세 살에는 힌두교 풍습에 따라 카스투르바이와 결혼했다. 1887년, 간디는 사말다스에 합격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1학기에 퇴학하고 말았다. 1889년 9월,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법률을 전공했다. 그는 영국에서 거주한 동안 많은 종교 서적을 탐독했다. 이것은 후에 비폭력 운동에 대한 그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1891년 간디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했다.

 

1893년, 간디는 안건 처리를 위해 남아프리카에 갔다가 아예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비폭력 저항 사상은 그곳에서부터 실제로 적응되기 시작했다. 간디는 인도 사람들이 남아프리가에서 온갖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인도 교민을 위한 단체인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민들의 평등한 대우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인도인들에 대한 인두세를 폐지했고 인도에서 한 합법적인 결혼이 남아프리카에서도 유효하게 되었다.

 

1914년, 남아프리카에서 21년을 생활한 간디는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는 런던에서 인도 교민들을 모아 지원 구호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뒤에 인도에서도 영국을 위해 군인 모집에 나섰다. 이것은 영국을 감화시켜 인도의 자치권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영국은 인도인들의 자치 요구를 묵살했을 뿐 아니라 인도 해방운동을 탄압하는 《롤라트 법안》을 발표했다. 간디는 즉시 비폭력 운동을 조직했다. 전국의 총파업을 주도하고 인도인들에게 절식과 기도로 항의하자고 했다. 1919년, 간디는 최초로 영국 정부에 '비폭력 비험조'를 주장했다. 이것은 인도인들에게 영국 식민 정부의 하교, 법원, 입법기관을 배척하고 영국 물건과 영국에서 위임한 국가 직무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1920년 초, 국대당은 간디의 비폭력 비협조 운동 계획을 승인했다. 같은 해 간디는 비폭력 비협조 운동으로 자치권을 얻어내자는 내용을 포함한 새로운 당 헌장을 기초했고 국민회의파에서 승인받았다. 1922년, 간디는 영국 식민 정부에 의해 6년의 금고를 선언했으나 뒤에 병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1924년, 간디는 국대당 당수로 선출되었고 비폭력 운동은 전국적인 '항영운동'이 되었다. 1929년, 국민회의 파는 연차 총회에서 인도의 완전 독립 제안을 통과시켰고 당 헌장에서 요구하던 '자치'를 '완전 독립'으로 바꾸었다. 1930년, 인도의 각종 방직제품 수출이 1/3이나 감소했고 방직제품을 구매하던 영국 회사 16곳이 파산했다. 그러나 인도인의 무명 공장은 1년 만에 384곳에서 600곳으로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간디는 영국 정부가 즉각 인도에서 물러나 줄 것을 요구했다. 1947년, 영국 정부는 인도의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인도를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분리하는 '마운트배튼의 분리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방안은 격렬한 종교적 충돌을 빚었고 간디는 두 번이나 단식을 하며 상호 인명 피해들 막고자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48년 1월 30일, 79세가 된 간디는 저녁 기도회장에 들어서다 힌두교 극우파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간디는 평생을 인도인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인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아 '성웅' 또는 국부로 불리고 있다.

반응형
반응형

고리키, Gorky, 무산계급 문학의 대표주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고리키
입니다 :)

고리키, Gorky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고리키, Gorky, 무산계급 문학의 대표주자

 

생몰년 : 1868~1939년
국 적 : 구소련
출생지 : 볼가강 유역 니주니 노브고로트
성 격 : 꿋꿋하고 노력하며 열정적임
신 분 : 문학가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아버지는 목수였음

고리키의 원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이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그는 어렸을 적 선량한 외할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고리키는 초등학교를 2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열 살에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배달부, 야간 경비, 제빵사 심지어는 노숙자로 지내면서 인생의 쓴맛을 모두 보았다. 사회 하층의 생활과 풍부한 독서량은 그에게 러시아에 대한 깊은 인식을 심어주었고 훗날 문학 창작의 풍성한 소재가 되어 주었다.


1892년, 고리키는 필명으로 첫 장편 소설 《마까르 추드라》를 내놓았다. 1896년 그는 《니즈니노브고로뜨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고리키의 초기 작품은 많은 노숙자들의 모습을 담아냈으며 낭만주의 색채를 깊이 띠고 있었다. 그는 1901년 《바다제비의 노래》에서 바다제비를 러시아 무산 계급 혁명자의 화신이자 승리의 예언자로 비유하면서 격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폭풍우여! 더욱 거세게 몰아쳐라! 1901년부터 고리키는 혁명 투쟁의 거센 흐름에 뛰어들어 수차례나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1902년, 짜르의 전제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쓴 희곡 《밤주막('밑바닥' 이라고도 함)》이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책은 인쇄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고리키는 대학과 공장 그리고 살롱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1903년, 짜르 극우파가 그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고 온 사회와 여론은 크게 분노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고리키는 '우리는 다시는 이런 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라며 신랄하게 말했다. 그는 짜르의 폭정에 항의하기 위해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전제정권의 전복을 부르짖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뒤에 짜르 정부는 사회와 여론의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해 그를 석방했다.

1906년, 고리키는 미국으로 갔다. 고리키는 미국에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장편 소설 《어머니》를 썼다. 그는 노동 혁명가 파벨 모자의 영웅적인 모습을 이 책을 통해 표현해 냈다.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접하고 실질적인 투쟁에 참가하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과, 무산 계급 정당 지도하의 노동 운동의 발전을 묘사했다.

아울러 그는 '혁명 이론이 없으면 혁명 운동도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의 《어머니》는 첫 번째 사회주의 현실주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에 고리키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지를 돌았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창조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중편소설 《참회》에서 이런 사고를 명확히 반영하고 있다. 고리키는 1905년에 레닌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때 레닌은 그의 사상 발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성심껏 도와주었다. 1913년, 짜르 정부의 정치범 대 사면으로 고리키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뒤이어 그는 3부작 자서전의 첫 두 편인 《유년시절》과 《세상 속에서》를 완성했다. 10월 혁명 후 고리키와 볼셰비키 간에는 의견이 나뉘었다. 고리키는 사람의 생명과 문화를 존중했고 러시아의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을 영수로 하는 볼셰비키 당에서는 낡은 세력과 반드시 결연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고리키는 자서전의 마지막 한 편인 《나의 대학시절》을 완성했다. 그는 1925년, 다시 장편 소설 《아르타모노프 일가의 사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러시아 자산 계급 3대의 생활을 통해 러시아 자산 계급의 현황을 노골적으로 폭로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장편 소설 《클림 사므긴의 생애》였다.

고리키는 생전에 많은 명성을 누렸기에 그의 고향은 지명을 아예 고리키로 바꾸었다. 모스크바에도 고리키 거리가 생겨났다. 문학 창작 외에도 고리키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레드 버진지》 잡지의 편집 일을 보았고 세계 문학 출판사를 세웠다. 또한 적극적으로 국내 전쟁사와 공장사를 집필했다. 그는 많은 소련 작가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18일, 고리키는 68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반응형
반응형

토끼띠의 전체적인 성격과 운세, 토끼띠에 대해 궁금하다면?

 

토끼띠의 성격과 운세

 


토끼띠는 온순하고 친근하며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화내는 일이 매우 적으며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한다. 

뿐만 아니라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즉시 그 장소를 떠나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 한다. 

이런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한두 명씩 볼 수 있는데 만약 당신의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토끼띠라고 예측해도 대개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토끼는 12지 중 제일 약소한 동물로서 토끼해에 태어난 사람은 토끼와 같은 품성을 갖고 있다. 

즉 적을 만드는 것을 끼려 하며 처음 만나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된다. 

그리고 매우 신중하고 세심하다. 


범띠에 속하는 사람을 호방한 신사라고 한다면 토끼띠에 속하는 사람은 예절 바르고 지조가 곧은 신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부터 의식이나 복장 등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쓰며 조그마한 실수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므로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그러다 보니 신경질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토끼띠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신중하여 비밀이 많고 현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시끄러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좋다주의' 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리고 지나치게 평온한 생활을 기대하기 때문에 매사가 보수적이고, 개혁성이 약한 사람이 되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토끼띠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개척 정신이나 애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뇌 회전이 빠르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일을 이끌려 하지 않을 뿐이다. 

토끼띠에 대하여 중국 사람들은 '교활한 토끼는 굴 세 개를 판다'는 속담으로 그들의 특성을 말한다. 

즉 토끼는 세 개의 굴을 준비하고 언제나 위험에 대비한다. 

토끼띠는 직관력과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나 사전에 위험을 알아채고, 신속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능력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개인적인 쓰임새보다는 사회단체의 단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때문에 지도자급에 속하는 토끼띠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이끌지 않고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이를 상급자에게 반영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본래 토끼띠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인간관계의 번뇌와 속세의 복잡한 일을 없애버리고 자기 세계를 보존하는데 목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토끼띠들의 일생 운세와 재산 운에는 큰 난관이 없고 완만한 상승곡선을 이루어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직업적인 면을 살펴보면 섬세하고 민첩한 감각을 발휘할 수 있는 의류업이나 인테리어, 화가, 시인 등이 비교적 좋다. 

성격이 온화하고 독실하여 사람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으며 대부분의 토끼띠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조율하거나 금전 관리 등에 등용되기 쉽다. 

이러한 사업에 종사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전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이외에도 소띠나 범띠처럼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을 내조해도 좋다. 


토끼띠에 속하는 남성들은 자기 자신과 가정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애처가이다. 

주방에서 밥을 짓거나 채소를 볶는 등 작은 일에 즐거움을 느끼며 주말이면 집안일을 잘 거들고, 집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토끼띠 여성 역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섬세하지만 남성들보다 긴장감이 더 강하기 때문에 감각도 더 예민하다. 

바꾸어 말하면 남자는 비교적 온화한 성격이고, 여성은 비교적 개성이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청결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색채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의류업계에 종사하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 

동시에 정조를 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기 때문에 이들이 일단 연회석상에 나타나기만 하면 연회장은 생기가 넘치게 된다. 

남성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자신에게 맞으며,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후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따로 사업을 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토끼띠는 남녀 모두 로맨틱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데이트 장소는 미술관이나 조용한 공원, 혹은 호숫가를 찾아서 사랑을 속삭인다. 

남자들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서 순정 어린 여자를 아내로 삼아야만 결혼생활이 화목할 수 있다. 


중국 속담에 '토끼띠 남자의 결혼생활에는 은혼식과 금혼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만약 당신의 남자 친구가 토끼띠라면 그에게 남자로서 넓은 마음을 가르칠 것을 권하고 싶다.

반응형
반응형

용띠에게 좋은 해는? 용띠 해, 뱀띠 해, 소띠 해 를 기다려보자.

해에 따른 용띠의 운세는?

 


쥐띠 해 
연애에 진척이 있고 사업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기찬 해이다. 

돈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한 번의 잘못이 용띠의 재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긴장을 늦추는 것이 좋으며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커다란 문제는 없다.


소띠 해 
행운의 해이다.

일의 진척도 원만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많은 분쟁과 골칫거리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행운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 해에는 많은 어려움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며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호랑이띠 해 
걱정과 과중한 부담이 생기는 해이다. 

계획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고 심한 다툼 없이 바라는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는 서로 반대의견을 가진 집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며 자기와 손잡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의 슬픈 소식이나 이별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다.

토끼띠 해 
토끼띠 해에는 용띠에게 안정을 준다. 

다시 행운의 바람이 불어 그의 항해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순조롭게 일이 성사되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기지만 보다 안정이 된다. 

금전적인 곤란이나 나쁜 소식 없이 안정된 시간이 그를 기다린다.


용띠 해 
용띠에게는 가장 좋은 해이다.

저금이 많아지고 하는 일에서 인정을 받거나 굉장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바쁘고 활기찬 해여서 매우 바쁘게 뛰며 맡은 일이 모두 쉽게 성공한다.

뱀띠 해 
행운의 해이다.

사소한 반대에 부딪치기는 하여도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잘 되어갈 것이다.

가정생활이나 연애를 무시하기 때문에 약간의 개인적인 또는 애정적인 면에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말띠 해 
불안과 불쾌한 사건이 발생할 해이다.

너무 고집을 부리고 공격적이 아니라면 대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약간의 사건이 그의 생활을 일시적으로 동요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

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인 걱정들이 그를 괴롭히기 때문에 이 해는 편안하지 못한 시간이 될 것이다.

양띠 해 
이 해에는 금전적인 모험과 직장에서의 승진에 있어서 보통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약간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나 가정생활은 평온하다.

주위에 동요나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원숭이띠 해 
용띠에게는 착잡한 해이다. 

직장과 금전적 문제에서 진척이 있으나 괜찮아 보이는 어설픈 결과에 속아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법적인 문제에 얽혀 들게 된다. 

너무 단호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우정이 깨어지거나 애인과 다툼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거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닭띠 해 
행운과 다사다난이 함께 오는 해이다.

좋은 소식, 승자, 잃었던 돈의 회복이 있다. 

가정생활은 평온하고 손실을 보충하거나 영향력 있는 친구를 새로 사귈 수 있다.

개띠 해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어딘지 모르는 것에서부터 생기고 계획에 착오가 생기기 때문에 용띠에게는 매우 어려운 해이다.

적수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것을 피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이다.

환경을 바꾸거나 믿을 만한 친구와 교제함으로써 긴장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돼지띠 해 
경상적으로 일이 풀리고 개띠 해 동안 그를 짓눌렀던 검은 구름 사이로 행운이 비춘다. 

여전히 사업이나 금전에 관한 복잡한 문제가 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많이 여행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가정 내에서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퀴리부인
입니다 :)

퀴리부인,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퀴리부인, Curie, 과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

 

생몰년 : 1867~1934년
국 적 : 프랑스 폴란드 출생
출생지 :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성 격 : 인내심 강하고 내향적임
신 분 : 과학자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마리 퀴리(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면서 마리를 퀴리 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함)의 아버지는 중학교 수학과 물리 교사였다. 마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물리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마리는 여섯 살에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열네 살에는 바르샤바 공리 여중을 다녔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졸업했는데 성적이 우수해 학교에서 수여하는 금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 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외 유학을 시킬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리는 5년간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1891년, 마리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 이과부에 들어갔고 189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물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894년, 마리는 프랑스 실업촉진위원회의 부탁을 받고 각종 금속의 자성에 대해 연구했다. 이 기간에 그녀는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잘 통해 1895년에 결혼했다. 당시 프랑스 물리학자 베크렐은 우라늄염에서 모종의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방사선이 기체를 이온화한다는 것과 X선과는 달리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굽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우라늄염이 어째서 이런 방사선을 방출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퀴리부인은 베크렐의 발견에 흥미를 느껴 곧 이것을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수차례의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방사성이 강한 원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피에르도 퀴리부인의 연구에 참여했고 결국 1897년 7월, 퀴리 부인은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확인했다. 퀴리 부인은 이 원소를 폴로늄(원소 기호는 Po)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시 제정 러시아에 짓밟힌 조국 폴란드(poland)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12월 퀴리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방사성이 더 강한 원소를 발견했다. 이 원소는 컴컴한 곳에서도 스스로 빚을 낼 수 있었다. 퀴리 부인은 이 새로운 원소를 라듐이라고 이름 지었다. 라듐이라는 이름은 방사선을 뜻하는 라틴어인 'radius'에서 비롯된 것이다.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두 가지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퀴리 부인은 역청 우라늄에서 라듐을 추출해 과학계에 자신의 발견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45개월간의 분투함에 퀴리부인은 결국 1902년 1/10그램의 라듐을 얻어 라듐의 원소량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03년, 퀴리 부부와 베크렐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퀴리부인은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의 영예를 안은 여성이 되었다. 

 

1909년 4월 19일, 피에르는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불행히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퀴리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혼자서 그들의 공동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는 1910년 금속 라듐의 분리에 성공했고 라듐의 원소량을 235로 확정했다. 같은 해, 그녀는 명저인 《방사성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1911년, 퀴리부인은 라듐 연구에서 중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 인정되어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라듐의 발견과 활용은 퀴리부인을 세계적 명성을 가진 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첫 번째 여자 회원이자 파리 대학의 첫 번째 여자 교수였다. 그녀는 일생을 통해 7개국에서 상장과 상패를 24회나 받았고 25개국에서 100 여개의 명예직을 받았다. 그럼에도 퀴리 부인은 시종 겸손하고 고 귀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 퀴리 부인은 만년에도 계속 부지런히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장기간 방사성 원소에 노출되어 그녀는 악성 백혈병을 앓게 되었다. 1934년 7월 4일, 67세의 퀴리부인은 실험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에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