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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 Bolivar, 남아메리카의 워싱턴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볼리바
입니다 :)

 

볼리바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볼리바, Bolivar, 남아메리카의 워싱턴

 

생몰년 : 1783~1830년
국 적 : 베네수엘라
출생지 :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성 격 : 의지가 강하고 독선적이며 강경함
신 분 : 정치가
가 정 : 백인 지주 가정 출신


볼리바의 집은 큰 농장을 소유하여 수천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금광, 사탕수수 농장, 부동산 및 모직물 상점 등도 소유하고 있었다. 어려서 그의 부모가 모두 죽자 그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볼리바는 1797년 1월에 베네수엘라 민병대의 사관생도 모집에 참여했고, 이듬해 7월에 소위로 승진했다. 1799년에서 1806년, 볼리바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학했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의 폭풍이 거세게 일던 때였다. 이는 젊은 볼리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06년 조국으로 돌아온 뒤, 즉시 반식민 통치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1810년에서 1812년 사이 베네수엘라에는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볼리바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제1공화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볼리바는 다시 역량을 모아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1813년, 그는 혁명군을 이끌고 카라카스 등지를 해방시키고 식민군을 무찌르며 베네수엘라 제2 공화국을 세웠다. 그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에게 걸사적으로 항전하자! 며 사람들을 전투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 제2 공화국은 다시 실패했고 볼리바는 국외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볼리바는 경험을 바탕으로 노예제도를 없애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는 흑인들을 모아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도록 했고 많은 흑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볼리바는 스페인 왕실과 반역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혁명군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기로 약속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 세력을 키워나갔다. 볼리바는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려 노력했다. 그는 대도시를 공격하거나 식민통치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식민 통치의 손이 잘 닿지 않는 동부로 이동했다.


1819년 5월 볼리바는 혁명군 2,000명을 이끌고 고난의 대장정을 거쳐 남미 서부의 안데스산을 넘어 갑자기 뉴그라나다에서 나타났다. 같은 해 6월, 그는 군대를 이끌고 오야카에서 스페인 군대와 결정적 전투를 치워 대승했다. 이후에 그는 보고타를 점령했고 콜롬비아를 독립시켰다. 그는 곧 뉴그라나다와 베네수엘라 연방의 대통령에 선출됐다. 볼리바는 잇달아서 베네수엘라를 공격해 수도 카라카스를 점령하고 전국을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네수엘라의 독립 후, 독립군은 남쪽의 에콰도르를 향해 나가며 스페인 군대와 교전을 벌여 수도 키토를 점령했다. 에콰도르는 독립을 선언했고 이로써 남아메리카 서부가 모두 독립하게 되었다.

 

1819년 12월 뉴그라나다,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는 함께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성립했다. 블리바는 공화국의 대통령과 최고원수로 선출되었다. 당시 페루는 스페인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미치던 지역이었다. 볼리바는 힘든 전투를 치르고 엄청난 대가를 치른 뒤에야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페루 동부는 볼리바에 의해 해방된 뒤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볼리비아로 이름을 바꾸었다.


볼리바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472회나 치렀으며 남아메리카 사람들을 식민 통치에서 해방시켰다. 사람들은 독립에 큰 공헌을 한 볼리바를 '남아메리카의 워싱턴'이라고 불렀다.

 

1830년 5월, 볼리바는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12월 17일, 그는 47세를 일기로 콜롬비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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