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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Beethoven, 가장 위대한 작곡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베토벤
입니다 :)

 

베토벤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베토벤, Beethoven, 가장 위대한 작곡가

 

생몰년 : 1770~1827년
국 적 : 독일 
출생지 : 라인강변의 본 
성 격 : 거칠고 급하며 강함 
신 분 : 음악가 
가 정 : 부친은 궁정악장을 지냈음 


베토벤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늘 술에 취한 아버지를 경찰서로부터 모셔 와야 했기에 따뜻한 가정의 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베토벤이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돈 줄로 생각했다. 그는 어린 베토벤에게 억지로 힘든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했다. 또한 종종 한밤중에 술이 취한 채 돌아와서 베토벤을 깨워 연습을 시키곤 했다. 베토벤은 여덟 살 때 아버지 손  이끌려 라인강변에 나가 음악을 연주하고 돈을 벌었다. 열한 살 때에는 극장의 악단에서 일을 했다. 베토벤의 어머니가 1787년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거의 매일 밤 취해서 돌아왔다. 따라서 맏아들인 베토벤이 집안과 두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얼마 뒤,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피아노 가정교사로도 일했다.


1792년, 베토벤은 비엔나로 가서 음악가 하이든과 작곡가 센크, 음악이론의 대가 알브레히트 베이거 및 작곡가 살리에리로부터 사사받았다. 1795년,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고 손수 작곡한 '피아노 3 중주곡'을 연주해 비엔나의 귀족들과 시민들을 탄복시켰다. 이후로 5년 동안 베토벤은 제1번에서 제11번 '피아노 협주곡'을 써냈으며, 1799년에는 '제1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음악계를 놀라게 한 그의 명작들은 생명에 대한 환희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자유로움을 표현해 냈다. 베토벤의 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졌으며 스스로도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환희에 차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젊은 베토벤에게는 심각한 귓병을 앓는 불행이 닥쳤다. 처음에는 계속적인 이명이 있다가 나중에는 고음은 견딜 수가 없고 저음은 들리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베토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점차 혼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의 성격도 차츰 괴팍해져갔다. 1801년, 그는 열일곱 살의 소녀 줄리에타 주치아르디와 사랑에 빠졌다. 제14번 피아노 소나타 《월광》은 그들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러나 주치아르디는 2년 후 그를 떠나 어느 백작에게로 가버렸다. 

1802년,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시골로 가서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제2번 교향곡' 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귓병이 악화되어 베토벤은 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자신의 비참한 신세와 불행에 대해 적은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다시 마음을 바로잡고 1803년, 웅장한 제3번 교향곡인 '운명'을 완성했다.

 

베토벤은 그 후로 몇 년에 걸쳐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

 

제9번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체르', 피아노 소나타 제21번 '발트슈타인', 피아노 소나타 제24번 '열정', 오페라 '피델리오', '제4번 피아노 협주곡',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 교향곡 '운명', 제6번 교향곡 '전원',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등이다.

 

1806년, 베토벤은 다시 주치아르디의 사촌인 요제핀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그 해에 약혼까지 했으나 그들의 사랑은 겨우 4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요제핀도 베토벤을 떠나고 말았다. 다시 실연의 아픔을 겪은 베토벤은 더욱 실의에 빠졌고 행동은 더욱 난폭해졌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했을 때 베토벤의 보호인과 친구들은 분분히 피난을 가버렸고, 그는 고독과 경제적 곤란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 와중에서도 '장엄미사곡'과 '제9번 교향곡(합창)'을 완성했다. 특히 '제9번 교향곡'의 성공적 공연은 베토벤의 일생에서 가장 큰 영광이며 환희였다.


1827년 3월 26일, 비엔나에 봄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날 57세의 베토벤은 세상과 고별했다. 비엔나 시민 약 2만여 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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