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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Descartes, 근대 철학의 아버지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데카르트
입니다 :)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아버지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아버지

 

생몰년 : 1596~1650년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토오레느주 라에이시
성 격 : 세심하고 신중함
신 분 :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가 정 : 귀족 출신. 부친은 브레타뉴 지방의회 의원 및 법관을 지냈음

 

 


유년 시절의 데카르트는 몸이 허약했지만 궁금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캐묻고 원인을 밝혀내기 좋아했다. 부친은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나의 작은 철학자'라고 부르곤 했다. 데카르트는 8세 때 예수교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나 학교 수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교과서의 논증들은 애매모호하거나 심지어는 모순투성이의 이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수많은 철학, 수학, 문학, 역사 등의 진귀한 서적 등을 즐겨 읽었다. 1612년, 그는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4년 뒤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616년, 젊은 데카르트는 사회에 나가 세상을 통해 배움을 구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다년간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닌 후 1625년에 파리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학술계에서 명성이 자자해진 때였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방문자의 발길은 조용히 사고하는 것을 즐기던 그를 괴롭혔다. 1628년, 데카르트는 파리에서 네덜란드로 거주지를 옮긴 후 장장 20년에 걸쳐 연구와 세작 활동에 전념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수학과 철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수많은 책과 논문 등을 발표했다.


데카르트는 웅장한 이상과 포부로 평생 독신을 고집했으며 그의 저작 중 대부분은 네덜란드에서 완성되었다. 그는 1634년에 《우주론》을 써서 철학과 수학 그리고 수많은 자연과학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 1637년에 《기하학을 발표 했고 1641년에는 《형이상학적 성찰을, 1644년에는 철학 원리등을 출판했다. 데카르트의 저작들은 살아서는 교회의 지탄을 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금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데카르트의 사상이 전파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데카르트는 철학 분야에서 신이론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물리학과 생리학 영역에서도 수많은 독창적 견해를 제기했다. 특히 수학 분야에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근대 수학의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것은 과학사상 획기적인 의 의를 지닌 것으로 이로써 '근대 과학의 시조'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수학 분야에서 세운 주요한 공헌은 기하학(토지측량을 위해 도형을 연구하는 데서 기원했으며,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한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 문제를 대수학(수학의 한 분야로 수 대신의 문자를 쓰거나, 수학 법칙을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방정식의 문제를 푸는데서 시작됨)의 형식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수학의 방법으로 계산하고 증명하여 최종적으로 기하 문제를 해결해냈다.
 '해석 기하학' 은 이런 생각에 근거하여 창시되었으며, 이는 또한 미적분 창시의 기초를 마련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기타 과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쌓았는데, 이론상 '굴절의 법칙'을 이끌어 내어 네덜란드의 스넬과 공동으로 '빛의 굴절 법칙'을 발견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또 인간의 안구를 광학 분석해 시력 교정 렌즈를 설계하기도 했다.

 

또한 우주간의 운동량 총계는 상수(변수에 대하여 항상 일정한 값을 취하는 양)적 관점임을 제기했으며 '운동량 보존법칙' (질점계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아니하면 그 계의 운동량의 합은 바뀌지 아니한다는 법칙, 계를 구성하는 입자 개개의 운동량은 변할 수 있으나 전체 운동량의 합에는 증감이 없다는 법칙으로, 이때 질점계의 중심은 등속도 운동을 한다)을 창시하여 '에너지 보존법칙'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거나 물체에서 물체로 옮기거나 해도 전체 양은 변함없다는 물리법칙)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그는 유럽 근대 철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체계를 확립했으며, 유물주의와 유심주의를 결합해 철학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649년,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초청에 응해 스톡홀름으로 가서 여왕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659년, 감기로 인한 폐렴으로 불행히도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1819년, 그의 유해는 성 게르만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데카르트, 유럽 르네상스 이래 인류를 위해 이성표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했던 첫 번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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