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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의회 민주제의 기초를 다진 호국경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크롬웰
입니다 :)

올리버 크롬웰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의회 민주제의 기초를 다진 호국경


생몰년 : 1599~1658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헌팅턴
성 격 : 야심만만하고 거침
신 분 : 정치가
가정 : 젠트리 출신, 아버지는 시의회 의원을 지냈음


크롬웰은 자신의 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젠트리였다. 지위가 그리 높은 것도 유명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제멋대로인데다 장난꾸러기였다. 크롬웰은 열일곱 살이 되어서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청교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별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을 돌보게 되었다. 2년 후, 그는 다시 런던으로 가 법률을 공부했다. 스물한 살에 그는 상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많은 지참금을 가져왔으며 유능한 주부였다. 크롬웰은 현지에서 점점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고 스물여덟에는 헌팅턴의 대표로 국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젠트리
귀족을 포함한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지칭, 그러나 보통 신분적으로 귀족의 아래였다. 가문의 문장 사용이 허용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1642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발했을 때 크롬웰은 국왕 찰스 1세에 반대하며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와 헌팅턴 등지에서 자작농으로 조직된 기병대를 모집했다. 이 부대는 용감해서 종종 일당백으로 싸우면서 승리를 거두어 '철기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1644년 7월, 크롬웰은 '철기대'를 이끌고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 초기에 연전연패하던 의회군의 수동적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나중에 국회는 그에게 2만여 명으로 조직된 '새로운 모범군'을 창설할 권리를 주었다. 크롬웰은 이 군대로 네이즈비 전투에서 국왕의 주력 부대를 무찔러 국회군은 처음으로 내전에서 승리를 위한 기초를 닦게 되었다. 1646년 6월, 그는 국왕의 본영인 웨일즈를 함락시켰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국왕 찰스 1세는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국회는 그의 수훈을 표창하며 연 수입 2500파운드의 장원을 수여했고, 그는 런던으로 이사했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단두대로 보내졌고 크롬웰은 영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그해 9월 군을 이끌어 아일랜드를 원정했고 2년 뒤에는 스코틀랜드를 공격했다. 1653년 12월 16일 런던에서 열린 성대한 의식에서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이 되었다. 아울러 육해군 총사령관을 겸하게 되어 실질적인 군사 독재자로 군림했다. 영국을 통치하는 동안 크롬웰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상패권을 쥐고 있던 네덜란드를 무찔렀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항해조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로부터는 식민지 통상에 관한 특권을 얻어냈으며, 영국 선박이 폴로 해상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덴마크에 압력을 가했다. 카리브 해상에서는 스페인의 수중에 있던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자메이카를 빼앗았다. 이러한 조치들로 영국은 네덜란드를 제치고 해상 패권을 잡는 든든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1657년, 영국 국회는 《공손히 드리는 청원 건의서》를 전달해 크롬웰은 영국의 국왕이 되었다. 크롬웰은 완곡하게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도 호국경을 세습하도록 개정했다. 1658년, 크롬웰은 화이트홀에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2년 후, 선거로 새로 선출된 국회는 찰스 1세의 아들을 귀국시켜 왕위를 계승하도록 결정했다. 크롬웰이 온 힘을 다해 무너뜨린 스튜어트 왕조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호국경
1653~1659년에 존재한 영국 혁명정권의 최고행정관이다.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군사권, 외교권 등도 가지며 임명은 세습에 따르지 않고 선거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크롬웰이 초대에 취임하여 사실상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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