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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
입니다 :)

 

프란시스 베이컨,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생몰년 : 1561~1626년 
국 적 : 영국 
출생지 : 런던 
성 격 : 영민하며 언행이 신중하고 반항적임 
신 분 : 철학자 
가 정 : 영국 신귀족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옥새를 관장하는 일을 함 

베이컨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고 소년기에는 이미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열두 살에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학원에 들어가 수학했다. 재학 기간에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구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사회와 인생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1567년, 베이컨은 영국의 주 프랑스 대사 수행원 자격으로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2년 반 동안 머무르며 프랑스의 거의 모든 지방을 돌아다녔다. 당시 그는 수많은 신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때의 경험이 그의 세계관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79년, 베이컨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급히 귀국했다. 이후에 그는 변호사와 국회의원을 지냈다.

1589년, 그는 민사법원에 결원이 생길 때 자리를 대신하는 서기직을 약속받았는데, 이 때문에 20년 동안 공석이 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베이컨은 현실과 에서 벗어나는 모든 지식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경험 관찰, 사실 의거, 실천효과를 인식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제임스 1세의 통치 시기에 베이컨은 승승장구하여 고위관직에 올랐다. 1602년에 나이트 작위(Knight)를 수여받았고 1604년 제임스 왕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607년에는 법무부 차관, 1613년 에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618년에는 잉글랜드 대법관으로 벨럼 남작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1620년에는 다시 오르반스 자작에 봉해졌다.

 

- 베이컨의 명언 -

아는 것이 힘이다.

자연에게 명령하고 싶다면 먼저 자연에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


베이컨은 일생의 대부분 시간을 관직에서 보냈는데 만년에 감개무량해하며  '내가 가장 정통하지도 않은 곳에 재능을 낭비하며 보냈다' 고 말하기도 했다.

1621년, 베이컨은 국회로부터 뇌물 수수 혐의로 탄핵되어 고등 법원에서 4만 파운드의 벌금형을 받았다. 아 울러 런던탑에 수감되어 평생 궁정출입을 금지당하고 관직에 복귀할 수 없도록 처분되었다. 제임스 왕이 벌금과 수감은 사면해 주었으나 그 후에 베이컨은 정계를 떠나 평생 저작 활동에 전념했다.


베이컨은 일생 동안 많은 저작을 남겨 여러 방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중 1620년에 출판된《신기관》(Novum Oranum)은 베이컨의 가장 중요한 철학 저서이다. 베이컨은 이 책에서 근대에 창시한 경험 인식의 원칙과 방식을 제시했다. 이 책은 근대 철학사와 논리사에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이컨은 스콜라 철학이 당대 과학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권위를 열렬히 비판했다. 그는 과학 이론과 과학 기술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라고 말했고, '우상'을 타파하고 선입견과 환상을 깰 것을 주장했다. 그는 '진리는 시간의 딸일 뿐, 권위의 딸이 아니다' 라며 스콜라 철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연구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관찰, 실험, 분석과 귀납을 연결짓도록 강조해 귀납법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유물론의 입장에서 출발해 인식 과정에서의 감각 경험과 귀납적 논리의 작용을 중시했다. 아울러 경험을 수단으로 하고 감성과 자연을 연구하는 경험 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근대 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러셀은 베이컨을 '과학 연구 과정에 논리적 조직화를 도입한 선구자' 라며 높이 칭했다.

 

1626년, 베이컨은 냉동과 부패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감기에 걸려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이컨이 죽은 뒤에 사람들은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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