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악바르 대제, Akbar, 무굴제국의 걸출한 군주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악바르 대제
입니다 :)

 

악바르 대제, 무굴제국의 걸출한 군주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악바르 대제, 무굴제국의 걸출한 군주

 

생몰년 : 1542~1605년
국 적 : 인도 
출생지 : 오늘날 인도의 라자스탄 지역 
성 격 : 호전적이고 냉혹하며 진보적임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왕족 출신으로 아버지 후마윤은 무굴 왕조의 제2대 황제

악바르는 자하로딘 모하메드 하부르(무글 제국의 첫 황제)의 손자이다. 천성이 영리하고 활발했으며 용감하여 위험한 운동을 좋아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튼튼한 신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1555년, 부왕이 그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1556년, 후마윤이 죽고 난 뒤에 무굴 제국의 수도는 아프가니스탄에 의해 점령되었다. 악바르는 일부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 국왕으로 등극했고 열여덟에는 전반적인 통치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566년, 제국의 수도를 아그라로 옮겼다.


그는 할아버지의 열정과 탐욕을 물려받아 외부로의 영토 확장을 꾀해 아프간을 물리쳤다. 또한 대부분의 인도반도를 정복하여 유례없는 광대한 제국을 건실했다. 또한 인도를 다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제왕이란 무릇 힘써 공격하고 빼앗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이웃한 국가들이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쳐버리고 말 것이다." 이 말은 뒤에 무글 왕조 대외 정책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악바르가 세상을 뜰 무렵, 무굴 왕조는 이미 북으로는 카슈미르에서 남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아그라는 당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번화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악바르는 효과적인 관료 제도와 법률 제도를 정하고 중앙 집권제를 강화했다. 그는 통치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토지를 새로 측량, 분류하고 토지 유형에 따라 새로운 조세 제도를 운용해 정부의 세입을 늘렸다. 그로써 어느 정도 사회, 경제적 발전도 촉진할 수 있었다. 악바르는 문화적으로는 정통 이슬람교도였지만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두세 (성, 신분, 소득 등에 관계없이 성인이 된 사람에게 부과된 일률동액의 조세)를 받는 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에 힌두교도들을 대량으로 등용했다. 그는 제국을 위한 독립적인 의식의 형식을 정하고자 시도했고 황제를 가장 높은 신으로 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그는 여러 가지 종교에서 좋은 교리만을 모아 '신성 종교'를 만들었다. 이 종교는 널리 전파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는 이후 통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종교의 융화를 이루어냈다.

 

그는 또한 힌두교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려 노력했다. 과부의 개가를 허용했으며 과부 순장제를 철폐하여 국가의 문명화를 촉진했다. 각종 도서 자료를 수집하는데도 열중해 큰 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고, 우수한 문학 작품의 초고와 회화 작품들을 많이 소장했다. 그는 화가, 건축가와 조각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지위를 주고 종종 황실의 물건을 선사하기도 했다. 친히 힌두교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바라타족의 전쟁을 읊은 대서사시)의 번역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 자신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읽어서 들려주었다고 한다.(그는 난독증을 앓고 있었다고 함.)

그는 늘 이러한 심오하고 어려운 책들을 찾아 연구하면서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으며 결국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문맹 학자가 되었다. 그는 문학, 예술, 회화, 음악 등을 제창하고 보호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악바르는 만년에 아들 셀림 자한기르에게 왕권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다. 그는 셀림의 왕위 계승 자격을 폐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1605년, 악바르는 아그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