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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뎅, Rodin, 근대 조각의 시조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로뎅
입니다 :)

 

로뎅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로뎅, Rodin, 근대 조각의 시조


생몰년: 1840-1917년
국 적 : 프랑스
출생지 : 파리
성 격 : 끈기 있고 반항적이며 완벽주의자
신 분 : 예술가
가 정 : 평민인 가정 출신, 아버지는 경찰국 임시직 직원,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음

로뎅은 어려서부터 미술은 좋아했지만 다른 과목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아홉 살 무렵에는 그림에 심취해 학교에서 도망치기도 했다. 결국 누나 마리가 자신이 번 돈으로 로뎅의 숙식비를 대주며 무료 미술 학교인 파리 미술 공예 학교에 보냈고 그의 예술생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로뎅은 그곳에서 평생 존경하며 따랐던 스승 르콩드 보이보드라오(Leconde Boischaudrao)를 만나게 되었다. 르콩드 보이보드라오는 평범한 미술 교사였지만 로뎅의 예술 감각을 키워주고자 했으며 교칙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주었다. 스승의 지도는 로뎅의 일생에 큰 영항을 미쳤다.


이 기간에 그는 종종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유화 안료를 살 돈이 부족해 조각반으로 옮겼고 그때부터 조각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1857년, 로뎅은 국립 미술 전문학교(에콜 데보자르)에 지원했다. 그러나 3년 연속 낙방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누나는 실연으로 수녀원에 들어가 버렸고 1862년에 세상을 떠났다. 미술학교 낙방과 사랑하는 누이와의 이별이라는 이중의 고통 속에서 로뎅은 비통해하며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선량하고 사리에 밝은 수도원 원장 에마르 신부는 로뎅에게 수도원에서 나와 계속 조각을 하며 주님께 봉사하라고 권했다.


로뎅은 신부의 설득으로 다시 수도원을 나오게 되었다. 그 후 로뎅은 극장에서 장식용 조각을 만들거나 루브르 박물관 복도에 장식할 부조를 만들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젊은 재봉사 로즈 뵈레를 알게 되었고 얼마 후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1864년, 로뎅은 코가 내려앉은 거지를 모델로 한 《코가 이그러진 남자》를  발표했다.

 

로뎅은 작품의 표현력에 중시하며 창작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작품 속에 그대로 담아내어 조각 예술을 하나의 강력한 언어로 만들었다. 이런 예술적 사상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간절히 추구했었으나 300여 년 만에야 로뎅이 작품 속에서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각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1875년, 로뎅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얻고 현실주의의 창작 기법을 확립하게 되었다.

 

1876년, 로밍은 대형 인체 석고상인 《장상시대》와 《설교하는 세레자 요한》을 완성했다. 이들은 1880년 파리의 살롱에서 함께 전시되었으며 동시에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로뎅은 일생을 노력해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예술가이자 뛰어난 낭만주의 조각의 대가가 되었다. 로뎅의 위대함은 그의 작품을 대하는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낭만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천박함이나 공허함, 거짓과 같은 폐단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뿐 아니라 생각을 깨우기도 한다.

 

로뎅은 위대한 조각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의 학생이나 조수들은 예술적으로 로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로뎅은 결코 예술적 관점으로 학생들을 옭아매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니며 재주가 남달랐다. 그러나 로뎅은 살아서는 학원파의 공격과 조롱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청동시대》, 《생각하는 사람》, 《위고》, 《칼레의 시민들》과 《발자크》 등의 작품은 너무나 새로운 창작 기법을 사용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17년 2월, 로뎅의 아내 로즈 뵈레가 세상을 떠났는데 병들고 허약해진 로뎅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해 11월 17일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로뎅과 그의 두 제자 마이욜과 사부르델은 유럽 조각의 '3대 거장' 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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