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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Einstein,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

오늘 소개할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
입니다 :)

 

아인슈타인, Einstein

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 Einstein,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

 

생몰년 : 1879~1955년
국 적 : 미국
출생지 : 독일 울름
성 격 : 정직하고 겸허하여 예지로움

신 분 : 과학자

가 정 : 유태인 가정 출신, 아버지는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음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광범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배움에 대한 욕구와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열 살에 뮌헨의 루이트포르트 김나지움에 들어갔고 열두 살에 스스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공부했다. 열세 살에는 독일 철학자 칸트의 책을 읽었다. 그는 독일의 군국주의 교육에 불만을 품고 열일곱 살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그는 취리히 연방 공업대학에 입학해 수학과 물리를 전공했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국가 졸업시험에 통과하며 졸업했다. 1903년, 아인슈타인은 밀레바 마라치와 결혼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연보》에 과학 논문 3편을 발표해 과학 연구에 증대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한 편은 브라운운동에 관한 것으로 분자의 존재를 증명한 논문이다. 다른 한 편은 플랑크의 양자론을 발진시킨 것으로 광양자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이것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한 편은 운동하는 물세의 전기역학에 관하여》라는 것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첫 편이다. 그러나 당시에 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1년도 안되어 물리학의 세 가지 다른 영역에서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과학사상 유례없는 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6살이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업대학의 부교수, 프라하 대학과 스위스 연방 공업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1911년, 그는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과학대회에서 퀴리 부인과 알게 되었고 퀴리부인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은 독일로 돌아와 프로이센 아카데미 원장과 베를린 대학 교수로 임명받았고 카이저 빌헬름 물리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은 협의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10년 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16년, 그는 종합적 논저인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이 논저는 철학적인 심오함과 물리학적 직관, 수학적 기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울러 20세기 최고의 물리학 저서로 불리고 있다.

1916년, 아인슈타인은 다시 양자론의 발전을 총결산하여 현대 레이저 기술의 이론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오늘날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직 기초가 되었다. 또한 우주 항해와 천문학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1920년대 이후로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집중적으로 인구하고 1929년 통일장 이론》을 발표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나치 정권이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아인슈타인은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 그리고 1933년 11월에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톤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하다가 1940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아인슈타인이 협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 제기한 에너지 변환 법칙은 1939년에 이르자 순수 이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이미 원자 핵분열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얻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은 당시 원자 에너지 실험에서 선두주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매우 불안했다. 1939년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원자탄의 위력을 설명하고 미국 정부에서 속히 원자탄 연구에 뛰어들기를 권했다. 아인슈타인은 본래 원자탄을 만들어 위협용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1945년 8월 6일, 첫 번째 원자탄이 일본 히로시마 폭격에 쓰였다. 아인슈타인은 애통해하며 원자탄이 전쟁 무기로 쓰일 경우 인류의 밀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55년 4월 18일 새벽, 아인슈타인은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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