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 : 뉴욕주 하이드파크 성 격 : 지혜롭고 강건하며 적극적 신 분 : 정치가 가 정 : 세력가 집안 출신. 아버지는 미국 민주당 인사이며 자유주의자
루스벨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자주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삶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열 살 때 메사추세츠주의 그라톤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정치, 역사, 신문방송을 공부했다. 1904년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905년, 그는 앨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루스벨트가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아낌없는 내조를 해주었다. 1907년, 루스벨트는 콜롬비아 법학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다. 1910년, 그는 민주당 입후보자로 뉴욕주 참의원(양원제 국회의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12년, 루스벨트는 윌슨을 경선에서 당선하도록 도왔으며, 뛰어난 정치적 수단과 조직적 수완으로 민주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음 해 그는 월슨 정무의 해군차관보에 임명되어 7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1920년, 그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으나 당선에 실패한 후 한동안 보험회사의 부사장으로 근무했다. 1921년 여름, 그는 찬 물에서 수영하다가 그만 당시 유행하던 소아마비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의지로 병마와 싸워 이겨냈다. 1928년, 루스벨트는 다시 정계에 뛰어들어 뉴욕주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그 이듬해 미국에는 심각한 경제위기(대공황)가 닥쳐왔다. 루스벨트는 뉴욕주에 실업자 구제와 사회질서 안정을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여 민주당의 신임을 높였다.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백악관에 들어간 후 곧 그는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100일 동안 '긴급 은행법', '관리 통화법 도입', '전국산업부흥법', '농업 조정법' 등 15항목의 법안을 연속해서 내놓았다. 동시에 대규모 공사를 벌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사회복지를 개선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회경제는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30년 그는 다시 한번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7년, 루스벨트는 시카고에서 유명한 '격리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전쟁은 전염되는 것이다. 전쟁 지점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나 민족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파시즘 전쟁 사상에 참여할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미국은 중립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루스벨트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했다. 아울러 그는 반파시즘 국가에 유리한 조항들을 국회에서 통과하도록 했다. 1940년 5월 브리튼 전투가 발발한 후 루스벨트는 5개월 동안 영국에 대량의 무기를 보내어 실질적인 영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1940년 11월, 루스벨트는 세 번째로 다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중요한 담화들을 발표하며 국내 고립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미국은 세계 반파시즘 전쟁에 헌신하여 반파시즘 전쟁의 중견 국가가 되었다. 1940년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은 소련과 차용의정서를 협정해 소련에 전쟁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같은 해, 루스벨트는 영국 총리 처칠과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여 세계 반파시즘 연맹의 기초를 세웠다.
1944년 10월, 루스벨트는 미국 건국 200주년의 전통을 깨고 네 번째로 대통령을 연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루스벨트는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병과 고혈압이 자주 일어났다. 1945년 4월 12일, 그는 죠지아 온천의 리틀 화이트하우스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중 뇌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63세였다.
생몰년 : 1881~1973년 국 적 : 스페인 출생지 : 말라가 성 격 : 반항적, 감정이 풍부, 정직 신 분 : 예술가 가 정 : 평민 가정 출신, 아버지는 시골학교 미술 선생님이셨음
아버지의 영향과 교육으로 피카소는 여덟 살 때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우산 가게 앞에 걸어 놓고 사람들에게 감상하게 했다. 피카소는 열다섯 살 때 마드리드에 있는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1898년 성홍열을 앓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병이 완치된 후 피카소의 아버지는 그를 파리로 보냈다.
1900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개최하여 프랑스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04년, 피카소는 파리에 정착했는데 이 시기의 그림은 청색 위주였다. 그는 청색으로 인간의 고통을 표현해 냈는데, 당시 피카소의 궁핍했던 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피카소는 여화가인 올리비에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던 시기에도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피카소의 그림들은 밝은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를 장밋빛 위주의 그림이라 하여 '장밋빛 시대' 라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곡예사 가족》, 《공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부채를 든 여인》 등이 있다.
1908년 이후 피카소는 '입체주의' 화풍을 실현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있다. 피카소와 프랑스 화가인 브라크는 많은 풍경과 정물을 그리며 형식상에서 기묘한 효과를 추구하려 했다. 자연으로부터 체적과 공간을 뽑아내려 노력했으며 작은 평면으로 물체를 표현해 냈다. 그때 이후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피카소의 화풍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입체주의에서 신고전주의, 또 1925년 이후에는 초현실주의로 바뀌어갔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후 피카소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림을 판 돈 40만 프랑은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위하여 내놓기도 했다. 1937년 독일 파쇼(파시즘적인 운동, 경향, 단체, 지배 체제를 이르는 말: 독재) 공군이 스페인의 작은마을인 게르니카에 무려 3시간 동안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피카소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이 사건을 소재로 자신의 대표작인 《게르니카》를 그렸다. 이 그림은 검정색, 흰색, 회색의 세 가지 색감으로 입체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를 표현해 내며 고통, 불행, 전쟁의 잔학성 등을 표현했다. 그림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울고 있는 여인, 불이 난 집, 죽은 사람의 시제, 날 뛰고 있는 소, 창에 찔린 말 등이 그러져 있다. 이 그림은 파시스트의 폭행에 대한 강렬한 항의를 담고 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후에도 피카소는 여전히 파리에 거주하며 외부세계와 차단한 채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동시에 그는 반파시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파시스트의 폭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된 후 피카소는 대형 전시 작품 전람회를 열어 높은 영예를 얻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또 세계 평화를 위해 특별히 《평화의 비둘기》를 그렸다.